
감성의 계절인 가을은 한 해가 영글어 기울기 시작하는 때이며, 계절이 바뀌는 때이기도 하다.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고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내 마음은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든다는 김욕택 시인의 싯귀절이 떠오르는 11월이다.
올해도 타이밍을 잘 못맞추어 영주시내부터 시작되는 아름다운 노란 은행잎 축제는 놓치고 말았지만 선비촌을 비롯해 부석사에 남아있는 가을의 마지막 흔적을 그나마 맛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진즉에 겨울채비를 시작한 나무들은 자신을 비워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수북이 쏟아낸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뎌진 감성에 詩心이 깃들기도 했다.


흔히 부석사하면 소백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줄 알고 있는데 부석사는 소백산에 자리잡고 있는게 아니라 태백산 끝자락인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일주문에도 [태백산 부석사]라 쓰인 현판이 뚜렷하다.
부석사는 다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떠올리지만 배흘림기둥뿐이 아니라 호젓한 오르막길이며 사천왕문에서 안양루까지 오르는 108개의 계단을 오르며 차례로 만나는 가람의 배치... 그리고 해질 무렵, 안양루에 서서 멀리 첩첩이 이어진 능선 너머로 지는 해넘이 풍경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가는 길은 가을이면 샛노란 은행잎으로 장관을 이룬다. 조금 늦게 찾아서인지 은행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겨놓은 채 겨울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 길을 5분 가량 오르면 천왕문에 이른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는 고찰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창건 설화가 유명하다.







부석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고 낮은 석축이 이어져 눈길을 끈다. 석축은 모두 9개. 불가에서 구품정토 또는 구품만다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극락정토를 오가는 중생이 이승에서의 선행 정도에 따라 머무는 곳을 뜻한다고 한다. 크게 상, 중, 하품으로... 다시 이를 세 개씩 나눠 아홉단계로 구분된다고 한다.
즉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렀을 때가 하품,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가 중품, 범종루에서 안양루까지가 상품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안양루를 지나면 무량수전이 있는 곳, 즉 극락정토가 되는 셈이다. 각기 영역을 나누는 석축은 크고 작은 돌들과 무질서한듯 하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10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다.
천왕문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석축을 하나하나 지나다 보면 범종루를 거쳐 안양루에 이른다. 안양은 불가에서 극락을 뜻한다고 한다. 이 건물의 현판은 아래에서 보면 안양문인데, 위에 올라가면 안양루로 바뀌어 있다. 이 건물을 통해 극락세계로 들어가니 아래에서는 [문]이고, 극락세계에서 사바세계를 바라보니 위에서는 [루]가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P1010420[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323/38823/5/P1010420%5B1%5D.JPG)








역시 무랑수전 영역인 극락에서 바라본 세상은 각별하다. 멀리 뿌옇게 층층이 보이는 소백산 자락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보이고... 세상 만물이 한 눈에 들어오니 무념무상의 상태로 젖어드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배흘림기둥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 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목조건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장중함이나 2중 처마를 이용해 지붕 끝을 살짝 구부려 올린 팔작지붕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극락전을 능가한다. 그 안에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이 극락정토임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이다.



![P1010395[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323/38823/5/P1010395%5B1%5D.JPG)
오르막길 옆으로 아기 주먹만한 열매를 주렁주렁 드리운채 힘있게 서있는 수많은 사과나무를 보며 천천히 올라 안양루에서 바라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자태는 처음보는 장관이었고, 고개를 다시 돌려 무량수전의 칠이 벗겨진 고목의 자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웅장한 모습은 다른 사찰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장관이었다.
사진으로만 접해본 배흘림 기둥은 생각보다 더 크고 질박한 모습이었다. 안양루를 바치고 있는 나무기둥들의 각기 다른 모습은 한국인이 아니면 그 누가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을 바치고 있는 주춧돌은 원형으로 돌출되어 기둥을 바치고 있을 정도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단청 칠이 다 벗겨졌건만 더 고풍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감정이 故 최순우씨의 조상들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의 감정일까? 만약 무량수전에 다시 덧칠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다른 신축중인 사찰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인공적인 멋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이 사찰이 아니고 사대부 집안의 별장이었다면 안양루에 앉아 술먹는 운치는 이 세상에서 제일일 것 같았다. 그러나 유홍준씨의 지적대로 이곳에 스님들이 적은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는 장소로서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조상의 예술혼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벅찬 감동이다. 이들은 단순히 돌을 깎거나 나무를 얽어 만든 구조물이 아니다. 감정표현을 하지 않을 뿐 우리의 혼이 담겨 있기에 숨을 쉬면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언제나 우리 곁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부석(浮石) 우리말로 [뜬돌]이다. 돌이 떠 있다하는 말처럼 무량수전의 왼쪽 뒤로 부석이 있다.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고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다. 이 부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선묘는 중국 여인으로 의상대가사 중국에 있을 때 의상 대사를 몹시 사모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상이 신라로 갈때 입을 옷을 정성껏 만들어놓고 기다렸는데 선묘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의상이 배를 타러 갔다는 말을 듣고 급히 포구로 달려갔으나 배는 저만치 떠나고 선묘는 만들어 놓은 옷을 의상에게 던지니 곧 의상대사에게 전해졌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선묘는 해룡이되어 의상이 타고가는 배를 안전하게 건너게 하였고, 그 뒤 의상대가사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 아가씨가 돌을 3번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직도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 선묘각이 있고,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사당 내에도 선묘의 초상화가 있다.
![부석2[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323/38823/5/%BA%CE%BC%AE2%5B1%5D.JPG)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치켜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건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 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출전 / 최순우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학고재 / 1994 / p.78∼80



순흥의 소수서원 곁에 있는 전통선비문화 체험시설인 선비촌에는 아름다운 전통가옥이 들어서 있다 소수서원의 뒷문을 통해 이어지는 선비촌에는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김상진 가옥 등의 기와집 7채와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김구영 가옥 등 초가집 5채가 들어서 있다. 관심이 있다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의 가옥을 비교하며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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