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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천 기룡산~꼬갈산 (임고서원)

최두호 2017. 11. 20. 17:30
기룡산(騎龍山, )은 경북 영천시 자양면에 있는 이 산은

남서 방향의 시루봉과 동쪽 방향의 꼬깔산이 능선을 같이 하고 있으며
골짜기도 깊게 형성하고 있다.


산세도 규모가 크며 넓고, 높낮이와 가파름이 큰 산봉들이 즐비하여 웅장한 면도 있다.
또 남쪽의 산자락 아래에는 영천댐(자양호)이 있어 시원하고 넓은 호수를 굽어보는 맛도 있다.


특히 정상에서는 보현산의 천문대가 건너에 보이고

주변에 산군을 이루는 면봉산, 베틀봉, 수석봉, 운주산이 가까이 조망되며,
서쪽멀리 팔공산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상 바로 아래의 서쪽릉선에 형성된 낙대봉을 비롯한 암릉은 아기자기 하면서

올라 내리는 재미가 산행미를 절정에 달하게 한다.


정상 남쪽의 1km 아래의 산중턱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신라 천년고찰 묘각사가 있는데,

이 산의 명칭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동해의 용왕이 의상의 설법을 듣고자 말처럼 달려왔다 하는 데에서 “기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용의 자세을 닮았다고도 해서 기룡산이라고 하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양면소재지의 산행 들머리인 성곡리에는 영천땜 공사로 이전하여 복원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이 있어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된다.


 



 



 

울창한 산세...

 

앞에보이는 보현산...중간에보인 도로들이 보기융하네요..

 

 

  전망 바위에서 바라본 영천댐 풍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 임고서원  (오는길에...)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 36년(1603)에 중건(重建), 사액(賜額)되었다.
 
인조(仁祖) 21년(164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하고
영조(英祖)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선생(先生)을 추향(追享)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
현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地方官)의 비행(非行)을 근절(根絶)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濟)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고
시문(詩文),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임고서원



타이틀

: 기념물 제62호 ( ImgoSeowon[Village Schoolhouse])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조선명종 8년(1553)에 선생의 고향인 영천 사람들이 건립한 이후 소실과 중건, 정화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있다.

이미지

임고서원의 은행나무(기념물 제63호)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에 이르는 임고서원 앞 거대한 은행나무는 수령 약 500년의 노거수이다 .

정성껏 차린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갖다 놓고 성의껏 기도드리면

부녀자는 생남하고 병자는 소생하나, 나무에 해를 주는 자는 크게 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다.

인물이야기-정몽주(鄭夢周, 1337~1392) People: Jeong Mong-ju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향교를 세워 성리학의 기초를 정립했다.

문집으로「포은집」이 있고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단심가」가 전해지고 있다.

  찾아오시는 길

약도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내려 시청 방향으로 진입해 안강, 포항방면 28번 국도

조교삼거리에서 임고 방면 69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왼편이 임고서원이다.

     
     
     
     
     
     
     
     

     

     

     

    임고서원은  고려말의충신인  포은 정몽주선생을  추모하기위하여   조선명종8년 부래산에창건

    임진왜란때소실 선조36년 중건사액되엇다

    인조21년 여헌 장현광  지붕 황보인 선생 추향하였다

    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엇다

    1965년복원  포은선생만봉향 1980년보수정화하였다

    포은선생은  영천임고면  우항동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태어나

    왜구토벌에  공을세�으며  시문서화에도   뛰어났다

    공양왕4년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서원앞   은행나무

     서원안내문

     

     

     

     

     

     

     

     

    임고서원 (7년공사 준공)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1553년(명종 8)에 창건되었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셨다.

    155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에 옮겨 건립했다.

    1643년(인조 21) 장현광(張顯光)을, 1727년(영조 3)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5년에 복원되었다.

     

     

     

     

     

     

     

     

     

     

     

     

     

     

     

     

     

     

     

     

     

     

     

     

     

     

     

     

     

    영천시 임고면의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조선 명종 8년(1553년)에 선생의 고향인 영천 사람들이 건립했고

     

    소장전적 및 포은의 영정이 보물 제1109호, 제11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도 꿋꿋이 서있다.

     

    대대적 정비사업을  끝나고 유물관까지 준공되면서 찾을 만하다.

     

    그리고 충신이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길 곳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포은의 어머님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까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성낸 까마귀가 흰빛을 싫어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 더러일가 하노라(맑은 물에 깨끗이씻은 네 몸이 더러워질까 걱정이다)

     

    포은이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답한 시조로 알려진 단심가(丹心歌)가

     

    같은 돌에 새겨져 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단심가 원문

     

    차신사료사료 일백번사료(此身死了死了 一百番死了)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야여(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어조사여)

     

    한글로 고친 시조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영일정씨세보〉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윤태규 - My Way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곳 없네.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 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길 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으음)때론 큰 산 앞에서 무릎 꿇고서 포기도 하려 했어

    처음처럼 또 다시 돌아가려고 무작정 찾으려 했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이 웨이)

    (후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이 웨이)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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