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양구곡(華陽九曲)
해질 무렵 우암 송시열선생 유적지가 있는 화양동으로 갔다. 화양구곡은 언제 와 보아도 참 좋은 곳이다. 관광객이 없음으로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소장이 승용차 통행을 허락하여 주어서 파천(巴串)까지 힘들이지 않게 답사할 수 있었다.
화양서원과 만동묘(萬東廟)는 복원이 잘 되어 있었다. 만동묘는 송시열선생의 유교(遺敎)에 따라 수암 권상하가 숙종 29년(1703)에 건립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던 곳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7년 일제가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에서는 춘추계를 조직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1937년에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정으로 쪼아 훼손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렸다. 또 묘당(廟堂)을 철거하여 괴산경찰서 등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 매몰되었던 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2003년에 비각을 복원하여 놓았다.
송시열선생 묘소에 찾아가 참배를 하고 신도비문을 읽어 보았다.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40)~1689(숙종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俊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주자‧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27세 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열려졌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 추진의 핵심인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3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갔을 뿐 시종 제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 1월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다음해에 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송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하였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은 주자가 구축한 세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주치주의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자어류소분』『주문초선』『계녀서』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송자대전』이 있다.
날이 어두워서 암서재(巖栖齋)가 건너다보이는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민박집 앞의 금사담(金沙潭)의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외로운 길손을 기쁘게 하여 주었다.
선생이 정계를 은퇴한 후 이곳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암서재’라 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는데, 이 암서재에 홀로 앉아 선생의 시 ‘화양동’을 번역하여 보았다.
華陽洞
尤庵 宋時烈
天降大賢地闢靈 하늘이 대현(大賢)을 내리고 영경(靈境)을 열어
華陽水接武夷淸 화양(尤庵)의 물이 무이(朱子)에 연하여 맑다
寒松獨帶王春色 차가운 솔이 홀로 왕춘(天子曆의 春)의 빛을 띠어
萬古遺風不盡聲 만고의 유풍(遺風)에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擎天壁 경천벽
一曲春波可運船 한 굽이 봄 물결에 배를 운행할 만한데
揷天蒼壁傍深川 하늘을 찌른 푸른 암벽이 깊은 강 옆에 서 있다
聊將雙手扶傾柱 그저 쌍수로 기울어져 간 기둥을 붙잡았으니
卓立何曾染世煙 높이 서서 어찌 일찍이 세상 연기에 물들었으랴.
雲影潭 운영담
二曲寒潭倒碧峰 두 굽이 차가운 못에 푸른 봉우리 거꾸러졌고
白雲一抹掩山容 흰 구름 한 줄이 산 모습을 가리웠다
有時去作人間雨 때로는 흘러가서 인간세상 비가 되고
還向林端銷幾重 다시금 숲을 향하여 몇 겹으로 잠근다.
泣弓岩 읍궁암
三曲巖頭繫釣船 세 굽이 바위 머리에 낚싯배를 매어두고
春深精舍日如年 봄 깊은 정사(精舍)에 하루해가 일년만큼 길다
寒流尙帶號弓淚 차가운 물이 아직도 궁(弓)을 울부짖는 눈물을 띄어
晝夜鏘鳴最可憐 낮이나 밤이나 쟁쟁이 우니 가장 가련하다.
* ‘弓을 울부짖는다’는 말은 왕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말이니, 효종의 승하에 우암이 그러했다는 말. 옛날 황제가 정호(鼎湖)에서 죽어 용을 타고 승천하고 궁과 검만 남겨놓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궁검(弓劍)을 버림을 왕의 사망으로 표현했음.
<사진1. 암서재>
金沙潭 금사담
四曲尋眞上載岩 네 굽이 진경을 찾아 높은 바위 올라가니
疎松繞屋翠交毿 듬성한 소나무 집을 둘러 푸르름이 덥수룩하다
金沙玉石開仙境 금모래 옥석으로 선경(仙境)이 열렸으니
千載心期月一潭 천년의 심사(心事)는 달이 비친 하나의 못.
瞻星臺 첨성대
五曲山行漸向深 다섯 굽이 산을 거닐어 점점 깊은 데를 향하니
瞻星臺上秀穹林 첨성대 위에 높이 숲이 빼어났다
天公費巧磨崖石 하느님이 교를 부려 비탈 돌을 갈아서
留待孤臣寓苦心 외로운 신하 고심(苦心)을 붙여두기 기다렸다.
凌雲臺 능운대
六曲層臺倚綠灣 여섯 굽이 층층대가 푸른 물굽이 기대섰는데
凌高闊步透重關 높은 데 향해 활보하여 겹관문을 통과하였다
幽禽對話花交樹 그윽한 새들 대화하고 꽃가지는 사귀였는데
杖屨悠然盡日閑 지팡이 신 느긋하여 진종일 한가하다.
臥龍巖 와룡암
七曲蒼崖白石灘 일곱 굽이 푸른 비탈 백석의 여울
臥龍神迹永留看 와룡의 신기한 자취 영구히 남겨져 본다
潛藏自有陽昭德 잠겨 있으나 스스로 밝은 양(陽)의 덕이 있어
終透重陰九野寒 마침내 중한 음(陰)은 땅의 추위를 뚫고 나오리라.
鶴巢臺 학소대
八曲雲烟合復開 여덟 굽이 구름연기 합했다가 다시 열리니
蒼松挺立水灣洄 푸른 소나무 우뚝 섰고 물은 굽이쳐 돈다
幽情晩托千岩友 그윽한 정이 말년에 천암(千岩)의 벗에 의탁하니
莫向山扉報客來 산 사립문을 향하여 객이 온다 아뢰지 말라.
巴串 파천
九曲巴溪最豁然 아홉 굽이 파계(巴溪)가 가장 트였으니
雪鋪寒石玉噴川 차가운 돌에 눈이 깔리고 옥이 강에서 뿜어진다
行行始悟眞源到 가고 가다가 비로소 진경의 근원에 이름을 알았으니
勝景都輸此洞天 좋은 경치가 모두 이 동천(洞天)에 들어 있도다.
도학(道學)으로 널리 떨쳐 은일(隱逸)로 정승에까지 오른 우암선생의 시는 시의 면에서도 탁연한 일가를 이룩했음을 볼 수가 있다.
-『문학마을』제21호 문촌기행 ‘산수와 인걸의 고장 괴산’ 중에서-
2. 홍명희(洪命熹) 생가
<사진2. 홍명희 생가>
천혜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적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괴산은 예부터 충‧효‧예를 으뜸으로 삼아 충신‧효자‧열녀가 많기로 이름난 인걸의 고장이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내려 소백산맥에서 분기한 조령산,박달산,군자산 등 명산을 쏟아놓고, 그 골짜기 물이 괴강으로 흘러 화양동을 비롯하여 선유동‧쌍곡‧갈은‧연하‧풍계 등 모두 구곡(九曲)의 명승지를 이루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고장이기도 하다.
괴산군을 좌우로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괴강을 따라 올라가 괴산읍내로 가서 홍명희 생가를 찾아보았다. 불에 탄 폐가를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공사책임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괴산이 낳은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면서 정치인이었던 홍명희를 생각해 보았다.
홍명희는 괴산읍 제월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가인(可人)‧벽초(碧初).다이세이(大成中學) 졸업. 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와 휘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시대일보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27년에는 민족단일조직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해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 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해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곧바로 월북하여 북한공산당 정권수립을 도우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처음에는 『임거정전』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 연재한 이래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가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으로 간행된 바도 있다..
봉단(鳳丹)‧피장(皮匠)‧양반‧의형제‧화적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민중의 풍속과 언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연재가 시작되자 각계각층의 찬사를 받았다.
그의 문학적 태도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글로는 『신문예의 운동』이 대표적인데, 이 글에서 계급작품운동의 의미와 그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문학원류약론』『이조문학론의』『문학청년들의 갈 길』『학창산화』등의 글이 있다.
3. 중원미륵사지(中原彌勒寺址)
충주에서 단양까지 130리, 환상의 수상관광을 하기 위하여 선착장에서 광광선에 올랐다. 월악나루 ․ 청풍문화재단지 ․ 단양팔경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옛 선비처럼 한시를 짓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선상에서 마지막 남은 선비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선생에게서 보내온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지금 세상은 어수선한데 초연히 명산대천의 답사와 글쓰기로 나날을 보내시니 참으로 다복하십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필자는 다복할까?
셋째 날은 충주시내 관광을 마치고 수안보온천을 지나 하늘재와 지릎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중원미륵사지를 찾아갔다. 고려초기의 석굴사원 터로 현재 석축 안에 커다란 돌로 만든 석불입상과 석등 및 5층 석탑이 일직선상에 북향을 한 단탑식 커다란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석굴사원은 큰 돌을 이용하여 벽을 쌓아올린 뒤 목조 가구를 올려 완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석굴암을 본떠 지어진 것이다. 남아있는 석굴의 벽에는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감실을 조성 여래좌상 ․ 삼불좌상을 새겨 넣었다.
<사진3. 석불입상>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은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거대한 입상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원기둥에 가까운 몸체가 인상적이다. 높이 10.6m 거대한 석불로 5매의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고, 머리 위에는 8각의 보개를 얹었다. 머리에는 나발이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손은 가슴에 모아 둥근 보주를 들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불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는 얼굴크기에 비해서 어깨의 폭이 좁으며, 굴곡이 없는 원통의 몸매를 갖고 있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의 표현과 왼손에 감싸고 있는 보주 등의 표현 등이 미숙하게 처리된 모습이다.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불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부분이 변색되지 않고 밝게 미소 짓고 있음이 신비하고 자비롭다.
맹호처럼 우뚝 선 월악산의 준엄한 산세를 바라보며 청송과 기묘한 암반 길을 거닐어 보았다. 잔잔한 충주호와 산야풍치가 너무도 상쾌하여 오래도록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문학마을』제43호 문촌기행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 충주’중에서-
미륵대원
●.시 대 : 고려
- 유 형 : 사지
- 지 정 : 사적
- 지정번호 : 사적 제317호
- 지정일자 : 1987. 7. 10
옛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이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다.
이곳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의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모든 조영계획은 석굴암을 모방하였고 규모가 웅장한 반면에 퇴화과정이 역력한 석굴이라 하겠다.
본 사지는 1977년과 79년 두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그 윤곽이 다소 드러나게 되었고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것이 확실히 고증되므로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찰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소실된 듯하며 사찰 이름은 미륵대원 이었다.
중원미륵리사지 [彌勒里寺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彌勒寺址(사지)에는 5층 석탑(보물 95호) 立像 彌勒菩薩像,
거북등 몇 가지 유물이 남아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후 찬란한 불교문화가 절정을 달릴 때 쯤, 흥망성쇠의 세계 문명사가
그러하듯이 한쪽에서는 이미 내려가야 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불안한 세상이 정리되고 고려가 後三國을 통일한 후 그 들도 불교와 그 문화를
국가 경영의 중대한 이념과 사상으로 삼았다.
신라가 1000년 王國이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長壽의 왕조여서 고급문화가 존재한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후대의 고려라는 새로운 시대에는 오히려 탑, 石像 등 고전적인 불교문화는
그 美的인 수준에서는 후퇴한 측면이 있다.
물론 새로운 사상의 출현과 그에 따른 다양성의 추종으로 선택과 집중도에서 불리한
측면도 있지만, 三國의 문화를 통합하고 남아 있는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수 있는 기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답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점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는 생존을 위한 긴박한 경쟁이 사라진 사회는 오히려 나태해진다는
사실도 한몫을 하였을 것 같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역사에서 오히려 전쟁이 많았던 亂世에
문화 와 문명은 한 단계 발전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곳 중원(中原) 미륵 보살상(보물 96호)은 관촉사 일명 은진미륵(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218호)과 비교 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은진미륵보다는 앞선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신라의 마의태자와도 관계가 있다는 設도 있지만 확실 하지는 않다.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석굴내부 감실에다 설치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지붕 등 일부가
소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 大院寺로 불리어 졌을 이곳은 ,배치가 전통 사찰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전체로 보면 석불, 탑 ,귀부 등 일직선상으로 되어 있고 북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옛 고구려를 복원하자는 의미라고도 해석한다)
고려시대의 미륵보살상의 특징은 관촉사의 강인한 이미지 이곳에는 서민적인 이미지가 풍기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造形美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신체 전체를 표현하기에는 기능상 근본적인 난제가
있기도 하지만 비율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의 신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지방 豪族(호족)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 전쟁을 끝내고 창건한 새로운 王國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도 먼저 세상을 안정화시키는 노력의 일환이거나 , 힘든 세태에 종교에 기대고
쉬고 싶은 인간적인 욕구 때문에 美적인 측면은 무시 되었을 것이고 중요성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입상의 佛像은 미륵불이기 때문에 먼 미래에 도착하게 될 사부 대중을 환영한다는 의미와 또 위엄과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자고로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에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고 불행한 시대였다.
조금은 묽어 졌지만 이것은 지금도 해당 될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일부만 남아있지만, 그 유물에서 우리는 과거를 반추하고 또 當시대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오늘을 진단하여 내일의 갈 방향도 느끼고 위로도 얻는다.(2009.12.17)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사지를 가다
월악산 - 하늘을 향해 뭔 말을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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