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산도 역사길’은 덮을개~대촌삼거리~망산교~정상~사각정~진두에 이르는 7.2km 길이다.
한여름이라도 해송이 기분 좋은 그늘막이 되고 바닷바람이 싱그러움을 더하는 코스다.
대구출발 (07시) - 청도휴게소(10분) - 거가대교휴게소(20분) -거제어구항(11시도착) - 점심1시간
어구항 - 을지카페리호 - 소고포 - 망산 - 덮을개 - 제승당 선착장 - 제승당 관람 1시간 - 소고포항 - 어구항
12시배 - - ( 2시간) - - (1시간) -(30분) = 15시30분 (3시간30분)
통영 중앙어시장 - 시장보기1시간 - 저녁(1시간30분) - 대구로출발,도착
(16시20분) - (17시30분) - (19시) -(19시 - 22시30분 )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65-1(어구항,어구낚시마을) -
경남 통영시 한산면 염호리 62-3( 염호리 소고포항) 왕복요금 2300원 X 2= 4600원
통영 중앙어시장 ( 경남 통영시 중앙동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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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촬영
드디어 15분 거리인 한산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럼 “이순신의 생애와
“한산대첩, 명랑대첩“등,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보고,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절을
돼세겨 보는 시간를 갖고자 합니다요,
꼭 함 읽어보시고 “성웅 이순신 장군의 유업을 2세들에게 들려주세요.
이건물은 한산섬에 건립된 이충무공 "충무사"입니다.
충무사 안에 있는 "이충무공"의 초상화 입니다.
-이충무공 의 이력-
이칭별칭 :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출생-사망 : 1545년 ~ 1598년
출신지 : 서울 건천동
본 관 : 덕수(德水)
관련사건 : 임진왜란, 옥포대첩,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저서(작품) : 난중일기
대표관직(경력) : 동구비보권관, 건원보권관, 사복시주부, 정읍현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여기는 이충무공이 수군을 통제하셨든 한산섬 "제승당 경내의 약도"입니다.
제승당 경내를 지나는동안 "수도 시설"을 거북선으로 만들어 놧드군요
이충무공 유적 설명 입간판입니다. 간판도 함 읽어보세요.
제승당 가는길에 휴계소 건물입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쉬여갈 틈이 없었습니다.
한산섬 제승당 경내를 거닐면서 통영앞바다를 바라보고 찍었습니다.
멀리 바다가운데 돌로만든 거북선이 보입니다.
앞에 보이는 바다물도 맑고 깨끗합니다.
아래의 우물의 내력을 기록한 입간판입니다.
당시의 사용했든 우물입니다
이우물은 "이충무공"이 수군들과 함께 사용했든 우물입니다.
바다갓에 인접한 "샘물"이지만 짜지않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곱게 정비 해놨드군요.
여기는 "대첩문" 이며, "제승당 "입구입니다.
초병이 창을들고 보초를 서 있는데요, 초병한티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 합니다요.
허락을 받을려면 초병한티 넙죽절을 해야 통과시킵니다.
저한티는 "아부지" 뻘 되신다면서 그냥 들어가라고 했습니다요. ㅎㅎ
대첩문을 지나 올라가는 도중에 만개한 :매화꽃과 백목련"이 보여서 그만 찰칵!!.
"제승당" 입구 대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두 정숙해야 합니다요.
들어갈땐 오른쪽 셋문으로, 나올때는 왼쪽셋문으로 나옵니다.
제승당 연혁 과 이충무공이 작전사령관실로 사용한 내역을 적은 입간판입니다.
이건물이 "제승당"입니다
"이충무공"이 해군 작전사령관실로 사용한 곳입니다.
여기서 작전계획도 수립하고 무기도 만들고 했다는군요, 안봐서 모르지만..!
여기는 "제승당" 유허비"가 모셔져 있습니다.
유허비 내력이 적힌 입간판입니다, 함 읽어보세요.
제승당 정화기념비입니다.
"충무사" 입구에 세워진 상징문입니다.
여기는 "이충무공 초상화를 모신 "충무사"입니다.
저도 문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방명록에 서명하였습니다.
충무공께서.. 감사하다,,,!! 하시드군요.
-이순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봅니다-
-장군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 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합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영의정 이었슴)은 ≪징비록 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라고 했다.)
-이순신은 28세 되던 해에 “훈련원 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응시중 낙마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실격하였습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9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 옥포 대첩 >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습니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습니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이순신은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습니다.
-5월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습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습니다.
-이때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습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됩니다.
<한산대첩 >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습니다. 제1차 해전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습니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습니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급히 항해하였습니다..
이 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대한하였습니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곧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습니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습니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이순신은 매우 반갑게 맞았습니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습니다.
이 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습니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놈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 한산대첩 >
-이 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 : 학이 날개를 펴서 공격하는 작전)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총 59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
와타나베(渡邊七右衛 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습니다.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
하였습니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시켰습니다.
-제3차 해전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은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새우며 원균 ·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습니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습니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아댓습니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습니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외수군을 궤멸시켰으며,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았습니다,
-그 뒤 이순신은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습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순신은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습니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외놈간첩의 농간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외놈“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습니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습니다.
-이 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습니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습니다.
-이 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습니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선조는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바로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선조임금”은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고 합니다.
< 명량대첩 >
-“명량”은 전남 진도군 문내면에 위치한 목입니다.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이 크게 패하고 “원균”이 전사한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1597년 8월 어란포에서 왜선을 격파한 후
왜군과의 전면적인 일전을준비했습니다.
-전선(戰船) 및 병력의 부족으로 수군 본부를 진도군 고군면에 “우수영”으로 옮긴
조선수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왜군이 133척의 배로 공세를 취하자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의 배로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적의 수로 통과를 저지했습니다.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로의 진영이 뒤엉키기 시작하자
조선군은 적장 “구루시마(來島通總)”의 목을 베어 사기를 높이며,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왜군은 30여 척의 배를 잃고 퇴각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조선군은 다시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왜군은 수군을 이용해 전라도로 침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쇄사슬을 “울돌목 수로”에 쳐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우수영의 울돌목”은 썰물때는 당시에 “쇄사슬”을 쳣든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 “울돌목”은 지난번 진도군 남망산 산행을 올리면서 잠깐 진도군 “우수영 울돌목”에
대하여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습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서 전군을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운명을 지켜보던 이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습니다.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습니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습니다.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명장입니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忠淸·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습니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 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해전사 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시조(時調)는 맨 나중에 참고로 올리겠습니다. 꼭 읽어주십시오.잉!!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습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고,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습니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습니다.
-이순신의 사당은 “통영의 충무사(忠武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이 있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큽니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습니다.
-또 통영에 “충무사”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경역을 늘리고 개보수 하였습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산도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조경을 새로히
하고 성역화 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합니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벽화는 충무사 내에있는 한산도 "해전도" 입니다,
당시의 처절한 해전의 참상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한산대첩의 해전도"에서 "학익진" 작전을 도면으로 표현한겁니다
“학익진(鶴翼陣)”=학이 날개를 편듯이 치는 진) 을짜서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한산대첩"을 다시 조명하자면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습니다.
-외장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그리고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거제도” 등지로 침범하였습니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 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습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 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습니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습니다.
-왜 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학이 날개를 편듯이
치는 진)을짜서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습니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습니다.
-왜 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고,
왜병 8,900명을 수장신키고,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습니다.
-“한산대첩”은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조선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H.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 진해시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원균”은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이요,
“인과응보(因果應報)=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결정되는것)”로 끝나는 군요.
즉 “원균”은 외적에게 “사면초가(四面楚歌)=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고립상태) 로
”적진괴멸(敵陣壞滅)=적진속에서 전멸하는것) 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 의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 이순신”은 3대 해전에서 “악전고투(惡戰苦鬪)”하셨고, “살신성인(殺身成仁)=옳은일을 위하여여 자기몸을 희생함) 의 참 정신을 일깨워 줍니다요.
※이충무공은 돌아가시기 전에 "약무호남(若無湖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는 존재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시(時) 모음>
여기 시들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어 남기신 “한시”들입니다.
다들 느끼시겠지만 오로지 나라와 백성 생각뿐이군요!
성장 이순신의 시를 통해 우국충정의 깊은 뜻을 음미해 보세요.
※이시는 1597년 8월 15일 열선루(전남 보성 관아에 있던 누각)에 앉아 읊은시입니다.
<한사도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 불끈 잡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 더해 주네
※이시를 지을때는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때입니다.
1593년 5월 남해안으로 전격 퇴각해 내려온 왜군들은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견내량을 막아서서 자신들이 서해 및 전라도 진출을 봉쇄하자
남해안 요해처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하는 한편
명-왜 간에 강화협상을 통해 모종의 변화를 모색하려 했을 때입니다.
무제(無題)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간담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가슴
살이 에이듯 쓰라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무습 그대로이고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네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말 달리던 곽자의 그립구나
원수 막으려 여러 해 했던 일들이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
-1594년 9월 3일-
다음은 “난중일기” 중에서
강화협상에 적극적이던 명군은 강화협상 중에는 전쟁행위를 일체 중단하자“는
왜군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 수군에게 전쟁금지령을 내렸고
선조임금은 명군 몰래 조선 수륙군 장수들에게 거제도 일대에 주둔해 있는
왜적을 공격하라는 밀지를 하달하게 됩니다
이순신에게도 밀지가 전달됬는데 아래의 일기는 그날의 일기입니다.
<<9월 3일 비가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바다와 육지의 여러장수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서 적을 치는 일이 업다“ 고 하였다.
3년 동안이나 바다위에 있었는데 그럴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자고 맹세하고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곳에 토굴을 파놓고 그속에 들어가 있는 적들을 경솔하게
나가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병법에서도)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는데 ,
엎어지고 자빠지고 위태롭기 그지없건만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난중일기, 1594. 9. 3.>
※이순신은 전략적으로 왜군이 한려수도 이동에 묶어두기 위해서 견내량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데 왕으로부터 밀지를 바자 황망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라는 싯귀는 자신의 전략적 의지와는 달리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기만 하고”.....라는 인식을 느꼈기에 결과적으로
임금을 속인 것이라는 자책과 한탄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면서.....>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했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 했지
오늘 밤 달 아래 한 잔술 나누지만
내일에 우리 서로 헤어져아 하네
-1595년 9월 14일-
<한산도 야음>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길어기 높이 떳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이루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1595년 10월 20일-
무제(無題)
병서도 못 읽고 반생 지내느라
위태한 때 충성 바칠 길 없네
지난날에 큰 갓 쓰고 글 읽다가
오늘은 큰 칼 들고 싸움을 하네
마을의 저녁 연기에 눈물 흘리고
진중의 세벽 호각 마음 아프다
개선의 그 날 산으로 가기 바빠
공적 기록 신경 쓸겨를 없으리
무제(無題)
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외로운 신하 시절을 한탄하네
소매 속엔 적 꺽을 병법 있건만
가슴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없네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기고
산하에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말 풀어 목장으로 돌려보낸 뒤
두건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진중음>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녘으로 위태로우니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새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 목숨 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
※그는 난중일기 속에서 위와 같은 몇편의 시를 남겼고, 이속에서 그의 사심없는
충절을 느끼게 하며, 적을 격퇴해야 할 용기는 선이 없음을 절로 느끼게 합니다..
※ 그의 시가 두편이 다시 발굴 되었습니다
먼저 그의 시 2편을 살펴봅니다,
(무제(無題))
빈궁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자연에 맡기리라
부귀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법
공명이란 임자가 없어 번갈아 서로 전하는 것이네
마침내 멀리 갈 때는 천천히 걷고
처음에 먼저 오를 때는 넘어질 것을 염려하라
도성의 누런 티끌 속을 헤쳐 나아갈 길에
남의 뒤를 따라가되 (말을) 채찍질하지 말라
※위에 시는 내용으로 보아서 충절보다는 자기증진에 교훈적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무제(無題))
시골에 산다 해서 어찌 반드시 서울과 다르랴
곳곳의 화평함이 제 집마다 있구나
만나는 곳엔 이제 마음의 불이 움직이는 것 같으니
그곳에선 귓전에 바람이 스치듯 하는 게 제일이지
악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풀을 버리듯이 하고
아름다움을 취해 보면 모두가 꽃이로세
옛 곡조 높고 출렁거리는 산수 밖에서
창랑의 한 가락을 그대들을 위해 노래하네
※2번째 시를 쓰면서 이순신은 곁들인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지금 붓놀리기를 청하고자 하나 눈이 침침하고 손이 부드럽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그러나 다시 “노익장”이라는 말을 얻고자한다
※이순신 이 전장터에서 죽지않고 천수를 다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이 두 편의 시는 이순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이순신은 전쟁에대한 광적인 인간보다는 여린 인간일 뿐이며,
'가슴 뭉클한 시'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한산섬과 통영시 중간쯤 되는 돌섬에 "거북선"을 만들어 놨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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