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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남 함안 용화산(龍華山) 능가사(楞伽寺) 유체꽃단지..3

최두호 2017. 11. 21. 12:42

 

 

 

 

 

 

 

 

 

 

 

 

 

 김선덕화 보살의것으로 보이는 부도(浮屠)

 

 

 

 

 

 

 

 낙화암과도 견줄수 있는 능가사 전경

 

 

 

 

 

 

 

 

 

 

 

 

 

 

 

 

 

 

 

 

 

 

 

 

 

 

 

함안 용화산(龍華山) 능가사(楞伽寺)와 함안능가사칠성탱(咸安楞伽寺七星幀)

 

경남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1151

 

용화산(龍華山) 능가사(楞伽寺)

 

 

용화산 능가사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1151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 법보종찰 해인사의 말사이다.

 

 

1.용화산의 유래

 

 

용화산의 용화란 불교용어이다.

원래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시대 초창기에 미륵신앙이 크게 성행함에 따라 전국에 미륵이나 용화와 관련된 지명과 산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승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륵신앙 즉 용화사상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신라의 미륵신앙과 용화사상은 화랑도와 아주 밀접한 고리로 연결되어 김유신 장군은 스스로를 용화도령이라 하고 자신을 따르는 화랑을 용화향도라고 부를 정도였다.

 

뚜렷하게 전래되는 용화산의 유래는 없지만 능가사가 자리한 용화산도 아마 용화사상과 미륵신앙에 따른 신라때부터 용화산이라 불리워지게 된 것같다.

 

물론 기복신앙에서 발현된 용의 모습을 龍華-즉 용의 빛으로 높이 해석하여 웅장하게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은 이 산을 용화산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용틀임을 할때 용이 도약시 움직이는 몸통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용화산 구구봉우리도 용틀임의 한모습에서 그릴수 있지 않을까 싶다.

 

 

2.용화산과 청송사

 

 

용화산에서 가장 절경이 좋은 곳에 옛날 청송사(靑松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청송사는 낙동강 최고의 절경속에서 미륵신앙과 용화사상으로 민간에 스며들며 특히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는 상인과 지역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으로 거대한 사찰의 규모를 가지고 융성하였으나 빈대가 워낙 많아 스님들이 모두 떠나 절이 폐허가 되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청송사의 실존 유무는 다행히 1744년 박상절의 圖說 “용화산수도”의 판각화로만 전하고 있다.

청송사가 사라진 이후 이곳에는 반구정이 세워졌는데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에 따른 함안지역의 막강한 유교세력에 밀려 청송사가 자연 쇠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3, 기복불교와 용주사(현,능가사)

 

기복이란 한마디로 복을 빌어 소원을 성취하는것이다.불교가 전래되기전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우상물을 두고 복을 간절히 바라고 비는 믿음을 가졌다.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산신,용왕등의 모태신앙에 붓다(buddha)라는 대웅을 최고의 우상으로 여겨 소원성취와 인간의 안위를 위해 조건없이 고개를 숙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자연 대표적인 믿음의 대상이 불교가 되었지만 시대가 변하고 조선시대 위정자들의 억불정책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스님들은 그래도 불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간다.

 

조선초 정도전의 저서 “불씨잡변”은 강력한 억불론을 주장하고 조선건국세력인 신흥사대부는 고려의 기득층인 불교세력을 조선왕조를 위협한다는 빌미로 수많은 사찰을 정리하게 된다.

 

아마도 고려의 대찰 청송사가 흔적없이 사라진것도 고려왕조때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을 유교세력인 사대부들이 절을 철폐하고 억압하자 망해버렸다는 설이 우세한것 같다.

 

그나마 함안의 장춘사나 창녕의 관룡사는 무릉산과 화왕산 깊숙이 산문을 닫은채 억불정책을 용케 피해 간 것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 전역에 242개사찰만 남기고 폐찰하였다고 한다.

 

이조 오백년 동안 숱한 억불정책을 펴면서도 막상 조선의 왕실은 개별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또한 일반 민중의 불교믿음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곳곳에 기복신앙의 형태인 칠성신,용왕당,대동치성등은 조심스레 행해졌으니 1871년 흥선 대원군이 유학의 폐단을 이유로 서원을 철폐한 이후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불교와 함께 1900년초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현,능가사 자리에도 칠성과 용왕을 모시는 조그만 기도처가 생기게 된다.

 

 

낙동강 칠백리중 가장 아름다운 용화산에 청송사를 재건하려고 온 스님의 토굴자리가 아니었을까.

안타까운것은 한일합방 이전에 절이 지어졌고 일제시대 철교가설 전에도 절이 있었다고 전해질 뿐 관련된 어떤 자료도 없다.

 

 

철교가 가설되기 이전 1910년대부터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용화산에 절이 있고 도천 송진(현 관음사)에 절이 있어 남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절이 용화산 용주절(용주사)이었다고 전해진다.

 

철교가 가설되고도 불상을 이운하는 가마가 용주절(용주사)로 갈 때 일본순사들이 칼을 차고 도열하여 의식행사를 치루었다는 내용은 사진으로도 남아있다.

 

 

또 당시 용주절의 스님을 모시며 헌식(獻食)일을 맡았던 김 선덕화(金 善德華)이라는 보살은 스님이 열반후 칠성과 용왕신을 모시고 운영하여 오다 형태상 정확한 절의 이름을 1955년 음력 3월에 붙인다.

 

 

이름은 용주사(龍珠寺)다. 현재 능가사의 옛날 절이름-

용주사(龍珠寺)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뜻에서 기인한것인가.

용화산의 형국이 용이라면 절이 있는 이곳은 용머리에 해당하고 턱속의 여의주는 지금 능가사 약사여래불이 서 있는곳의 형태가 된다.

 

불교에서는 여의주를 지나간 부처의 모든 사리가 변하여 큰 구슬이 되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하는 보석으로 표하고 있다.

 

김 선덕화 보살은 이곳에 용주사에서 부처와 용왕,칠성,사해조정용궁신장을 모신후 지역민의 믿음을 관장하고 복을 빌어주는 중매인이 된다.

 

 

특히 철교가 가설되기전 경남 서부인들의 한양행로와 지역상인들의 나룻배의 안전운항과 무사안일을 위한 용왕제를 주관하게 되고 사람들의 앞일을 꿰뚫어 보는 안목으로 대구와 부산 진주까지 그 명성을 떨친다.

 

 

당시에 살았던 나이 많은 분들의 이야기로는 남지철교아래에는 용의 아들인 이목(離目)이 살고있어 가끔 강물의 풍랑이 심하여 나룻배의 사고가 빈번하여 해마다 수신을 다스리는 용왕제를 지내야 도하가 쉽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번뇌와 열화를 줄여준다고 한다.

 

이처럼 용주사는 용왕제를 주관하며 1931년 철교가 들어선 이후 철교절로 이름이 자자하고 함안군 사람보다는 남지사람들의 기도처로 많이 알려져 있다.

 

 

4.능가사와 정유리세계

 

 

능가사(남지사람들은 남지 철교절이라 부르기도 함)의 창건당시 절이름은 용주사(龍珠寺)였다.

절이름도 땅의 형세 그대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합천 해인사에서 공부를 마친 지원스님은 전국을 찾아 만행을 즐기다 산세수려하고 풍치가 좋은 낙동강 용화산에서 용주사 김선덕화 보살을 만나게 된다.

 

 

이미 열반에 들 정도로 나이가 많은 선덕화보살이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자 1971년 지원스님은 이 절로 와서 1972년도에 능가사로 개명한다.

 

능가(능가)란 용어는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갈수있는 여래장사상을 설한 능가경에서도 나온다.

 

또 부처님이 대혜보살을 위해 법화경을 설한곳이 남천축국-스리랑카의 능가산이다.

 

한창 수행정진에 열중이던 지원스님은 불교경전중 특히 능가경에 심취하여 용화산 낙동강변에 여래장사상,

즉 인간은 본래 여래가 될 본성을 가진다는 뜻의 “일체중생은 여래장”을 선언하고 용주사를 능가사라 개칭한뒤 여래의 청정법과 상주불변의 법성을 중생에게 전하게 된다.

 

이후 능가사에서 용맹정진중 여래장사상과 결부된 여래태를 근간으로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의 아픔까지도 치유하라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용화산 머리에 약사여래대불을 조성하게 된다

 

이때가 1999년 착공하여 2000년 10월에 조성하니 부처님 경전에 보듯이 바로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인 大醫王佛 즉, 약사유리광여래인것이다.

현재 능가사의 약사대불은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어 약사십이대원을 베풀고 있는듯 하다.

 

 

5.용화사상과 미륵

 

 

청송사에서 시작하여 용주사와 지금의 능가사가 불교의 맥을 이어온 이곳은 낙동강 칠백리중 가장 아름다운 용화산 용머리 부분이다.

 

 

용화산의 풍수지리적인 형태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여의주를 희롱하면서 낙동강 깊은곳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남지방면에 볼때), 또 목욕을 즐긴 용이 도약하며 웅비하는 모습(대산에서 볼때)이며 두가지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상상해볼수 있다.

 

 

이처럼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소박한 염원을 향한 복을 비는 기복(祈福)사상에서 받침이 된 용화와 함께 용화산의 '용화'는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승천하는 용의 웅장함을 나타낸다는 의미,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제도하는 이상세계인 '용화세계'의 '용화산 용화“가 아닌가.

 

용화산(龍華山)의 행정적 위치는 함안군이지만 용화산에 자리잡은 공원이름은 남지공원이다.

소유자도 역시 창녕군이다.

 

권익에 따른듯한 소문이 있어 그 이유는 알고싶지 않다.

능가사는 지역민들의 애환과 정으로 연결된 고리임은 분명하다.

한때 정부의 철교 철거 결정이 내려질때 어릴적 용화산의 먼지를 먹고 자랐던 코흘리개 소년들이 일어섰다.

 

 

용화산 아래 흐르는 낙동강물의 웅장함과 같이 중년의 강한 남성이 된 그들-철교를 문화재로 등록시킨 학자,시인, 마을지도자들이었다.

바로 남지를 사랑하고 지켜가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철교지킴 과정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그들은 철교를 지키고 추억을 지키고 조상을 지켰다.

 

 

그 중심에 김부열, 이상주.박상선씨 등, 의연히 일어선 그들이 바로 애국자가 아닌가.

위정자도 정치인도 외교관도 아닌 민간이었지만 그들의 공로는 자자손손 기억될것이다.

남지민들의 피안의 세계인 용화산과 철교절 또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마음속 문화재가 된것이다.

칠원,칠서에는 남지댁이 많고 남지에는 칠서댁이 많게 한 오작교인 남지철교는 이렇게 멋진이들에 의해 지켜지고 그들은 또다시 후손의 안녕을 위하여 능가사 약사대불에 기원을 할것이니....

 

용화산 참꽃잎과 솔잎을 먹고 자란 그들에게 하늘의 칠성님과 낙동강 용왕,그리고 능가사 약사대불의 가피를 빌뿐이다.

 

 

아무튼 용화 사상을 기반으로 명명된 용화산의 용화,즉 미륵은 도솔천 내원궁의 보살로 미래의 지상낙원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또한 석가모니부처가 미처 제도하지못한 중생을 구제하니 용화수라고도 하여 이를 빗대어 보면 용화산과 능가사의 인연도 기막힌 일인것 같다.추측컨대 아마 억겁후 남지 용화산에서 미륵이 강림하지 않을까.

 

 

6. 능가사의 문화재

 

 

능가사가 소장하고 있는 경남도문화재 자료인 칠성탱은 19세기 조선말기의 제작기법으로 보아 청송사 이후 용주사가 창건되기전 이조말기에서 일제시대까지 존재했던 사찰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이때 남지인들의 마음속 중심 의지처인 용화산에서 인간의 수명장수및 재물과 소원성취,그리고 낙동강 상인들의 무사한 뱃길을 위해 기원해주는 기능을 사찰에서 관장한것이 아닐까 한다.

 

 

능가사 칠성탱은 칠성의 주불인 치성광여래를 가장 크고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어 치성광여래와 북두칠성이 중생의 마음을 두루 헤아려 주고 지역민 특히 남지인들의 병고와 고통을 구제해주는 주신으로 낙동강 용신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고 볼수 있다.

 

 

함안 능가사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위시한 칠성여래(七星如來)와 일광·월광보살 및 칠원성군(七元星君)과 8권속을 비단 바탕 위에 먹과 채색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불화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을 크게 양분하여 상단 중앙에는 청연화좌(靑蓮花座)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를 일광· 월광 두 협시보살과 함께 삼각형의 구도로 배치하고 있다.

 

 

협시보살 측면에는 좌우 각각 4구씩 8권속을 묘사하고 있으며,

주존 광배 후면 양 측면에는 6여래를 각각 3위씩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하단에는 거의 화면 절반 크기로 칠원성군을 큼직하게 배치한 후 뒷면을 구름으로 처리하여 상·하단 경계를 구분 지었다.

 

 

주존인 치성광여래의 머리부분은 정상계주를 지닌 융기하는 모양의 육계와 나발을 먹으로 채색한 후 윤곽선을 감색선으로 처리하고 있다.

얼굴에는 바림질이 없는 면색 위에 세필을 사용하여 담묵 선묘의 눈, 코, 귀와 감색의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 및 호분으로 표현된 백호, 그리고 주색의 조그만 입 등이 짜임새가 있게 잘 묘사되어 있다.

 

 

당당한 체구를 지닌 주존은 목에 삼도가 있으며 쳐진 가슴선 및 유두 표현도 묵선으로 그어져 있다.

주존은 주색의 대의와 녹색의 군의 및 주색의 군의 띠 묶음을 착용하고 있는데,

대의에 원권문 속 연화보상화문을, 군의와 청색으로 채색된 대의 속단에는 십자를 겹친 문양을 금으로 듬성듬성 그려 넣고 있다.

 

 

또한 주존의 원형 두광에는 양록색 바탕에 가장자리를 백색선으로 처리한 후 분홍색, 주색, 청색, 삼청색 순으로 채색하고 있으며,

신광에는 황색 바탕에 금채를 한 후 먹으로 광선문을 조밀하게 그어 놓았고 백색선으로 구획된 가장자리에는 분홍색, 주색, 청색, 양록색 순으로 채색하고 있다.

 

 

일광·월광 좌우 협시보살상은 주존 쪽으로의 1/4의 측면관을 지닌 채 주존에 비해 거의 절반가량 축소된 형태로 묘사되어져 있다.

주존과 같은 온화한 상호를 지닌 두 협시보살은 보관의 해와 달, 법의의 주색과 청색만 달리하고 있을 뿐 거의 도상이 같다.

 

 

이러한 점은 주존의 신광 좌우측 후면에 묘사된 6여래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져 있다.

협시보살상과 유사한 상호를 지닌 여래상들은 동일한 측면관과 합장인을 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만 좌우 첫 번째 여래상들만 두광 표현이 없는데, 이는 제작 당시 착오로 빠뜨렸던 것으로 보인다.

 

화면 하단에는 반신상 형태의 상단 도상들과는 달리 전신상의 칠원성군을 전면 가득 크게 배치하고 있다.

 

홀(笏)을 지니고 시립하고 있는 칠원성군 중 가운데 성군만 정면관에 면복(冕服)을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쓴 모습이며, 나머지 성군들은 측면관에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있다.

 

칠원성군은 세필로 수염 등이 세밀하게 묘사된 거의 동일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도상들과는 달리 얼굴에 약간의 바림질이 있다.

 

 

칠성원군 후면 좌우 측면에 각각 4구씩 상반신을 드러낸 채 가장 작게 묘사된 8권속 또한 칠원성군과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지만 머리에 상투만 튼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칠성탱은 제작 당시의 화기가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를 파악할 수 없지만, 가늘고 고른 세련된 필선에 의한 도상인물들의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 표현과 비례감 있는 신체 표현, 주색, 녹색, 청색 및 양록색 안료의 적절한 설채(設彩) 등에서 조선후기 불화의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청송사-용주사-능가사로 이어져 내려오며 보관되어 온듯한 능가사 칠성탱에 그려진 칠성신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 기우의 대상신이었다.

 

자식을 재워놓고 북두칠성을 향한 장독대위 정화수 한사발에 담긴 밤하늘 아래의 풍경은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자식을 위한 애틋한 염원이었으니까 말이다.

 

7.능가사의 가람과 전각

 

능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1900년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스님한분이 옛날 청송사의 재건을 위하고자 토굴로 시작된 이래 김 선덕화보살의 용주사와 현재의 능가사로 이어져 오고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과 관음전, 삼성각.용왕단, 요사채와 12M 높이의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문화재로는 2006.04.06일 경남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함안능가사칠성탱(咸安楞伽寺七星幀)

 

이 있다.

이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김선덕화 보살의것으로 보이는 부도(浮屠) 1기가 있다.

 

능가사는 현재 마산,창원 대구지역과 특히 남지인들의 기도처로 이름이 나 있고 사찰 주변에는 신,구 남지철교와 반구정,주세붕묘역이 있으며 용화산(龍華山)의 풍수지리적 모양새와 함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가람의 자태는 가히 제2의 낙화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최근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칠성탱을 보관하는 칠성각이 없어 아쉽지만 조만간 전각이 건립된다고 하니 능가사의 또다른 사료를 곧 볼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8.능가사의 창건주 벽담 지원스님.

 

 

능가사의 창건주인 벽담 지원스님은 일찍 동진출가하여 해인사와 동화사에서 대교과(현재의 종립불교강원인 승가대학4년과정)를 마친후 칠곡 도덕암과 직지사를 거쳐 전국을 만행하다 1971년 낙동강 칠백리중 가장 아름다운 용화산하 계내리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을 펼치게 되고,

 이후 용주사를 현재의 능가사로 중창불사하게 된다.

 

 

총부지 2000여 평의 가람은 이제 명실공히 지역민의 기도처로 자리매김하게 되니 고려의 화려했던 청송사의 복원과 함께 미륵회상(彌勒會上)의 용화정토(龍華淨土)를 이루기 위한 지원스님의 사바세계 보살행 실천은 낙동강 모래알이 항하사인가,

수없이 많은 중생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코자 오늘도 어김없이 법당의 대웅에게 기원하나니 법당한켠의 상사화 애절함은 바로 우리네 중생의 그리움이구나.

 

-글,소두보(한국불교문인협회)쓰다-.

 

 

**이글을 읽고 능가사를 순례하다...2010.12.11.현문

 

 

함안능가사칠성탱(咸安楞伽寺七星幀)

 

 

문화재자료 제396호 (함안군)

 

함안 능가사칠성탱비단 바탕위에 먹과 채색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불화

 

함안 능가사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위시한 칠성여래(七星如來)와 일광 월광보살 및 칠원성군(七元星君)과 8권속을 비단 바탕위에 먹과 채색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불화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을 크게 양분하여 상단 중앙에는 청연화좌(靑蓮花座)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를 일광·월광 두 협시보살과 함께 삼각형의 구도로 배치하고 있다.

 

 

협시보살 측면에는 좌우 각각 4구씩 8권속을 묘사하고 있으며, 주존 광배 후면 양 측면에는 6여래를 각가 3위씩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하단에는 거의 화면 절반크기로 칠원성군을 큼직하게 배치한 후 뒷면을 구름으로 처리하여 상·하단 경계를 구분지었다.

 

 

주존인 치성광여래의 머리부분은 정상계주를 지닌 융기하는 모양의 육계와 나발을 먹으로 채색한 후 윤곽선을 감색선으로 처리하고 있다.

얼굴에는 바림질이 없는 면색 위에 세필을 사용하여 담묵 선묘의 눈, 코, 귀와 감색의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 및 호분으로 표현된 백호, 그리고 주색의 조그만 입 등이 짜임새가 있게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칠성탱은 제작 당시의 화기가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를 파악할 수 없지만,

가늘고 고른 세련된 필선에 의한 도상인물들의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 표현과 비례감 있는 신체 표현, 주색, 녹색, 청색 및 양록색 안료의 적절한 설채(設彩) 등에서

조선후기 불화의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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