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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유회 보은 속리산...3

최두호 2017. 11. 21. 12:41

 

속리산 법주사(俗離山法住寺)

 

한국 거찰의 하나로서 법주사 일원은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 : 국보 제5호)·

법주사팔상전(法住寺捌相殿 : 국보 제55호)·

법주사석련지(法住寺石蓮池 : 국보 제64호)·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 보물 제15호)·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 보물 제216호)과

동양 최대의 철근 콘크리트 입불상인 미륵불상 등이 있으며,

속리의 정이품송(正二品松 : 천연기념물 제103호)과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

(천연기념물 제207호)가 자라고 있다.

 

탈골암이 법주사 위쪽 높이 약 560m에 위치하며, 그밖에 복천암·중사자암·

상환암 등 많은 절과 암자가 있다.

문장대를 제외한 봉우리들은 보은 쪽에 있고, 은폭동과 용유동계곡·쌍룡폭포·

오송폭포·장각폭포·용화온천 등의 명소들은 상주 쪽에 있다.

괴산군 청천면에 위치한 화양동계곡은 화양동구곡(華陽洞九曲)과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으로 나뉜다.

화양천을 따라 경천벽·운영담·금사담·첨성대 등이 좌우로 산재해 있으며,

하얀 돌 위로 흐르는 맑은 물, 울창한 숲의 조화가 절경을 이룬다.

선유동구곡에는 선유동문·경천벽·학소암·은선암 등이 있다.

 

유적지로는 보은군 쪽에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이, 상주 쪽에 견훤성이 있다.

법주사-세심정-복천암-중사자암-문장대-경업대-비로산장-세심정-법주사,

법주사-세심정-비로산장-상고암-천황봉-상환암-세심정-법주사,

고교리-7층석탑-천황봉-문장대-매표소-장암리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송이버섯·머루주 등이 유명하며, 매년 10월에는 속리축전이 열린다.

관광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과 식당·상가·사격장·양궁장 등

각종 위락·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서울·대전·보은에서 속리산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법주사 문화재 관람료 4,000원이 필요하다.

법주사 문화재 관람료 단체는 3,700원 경노 무료입니다.(경노,주민증,신도증 지참)

 

"호서제일가람" 이라는 현판이 붙은 법주사의 일주문이다.

 

 

속리산 법주사입구 사천왕문 앞 에 만들어진 안내도 이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이 비석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7년에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써서 법주사 입구에 세운 것이다.

내용은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서 수양한 사실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정동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10층 석탑을 세웠다.

이것을 효종 4년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건익 이 관찰사 임의백 에게 일러

탑을 헐어 버렸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住寺 碧巖大師碑) 

조선현종 5년에 건립한 벽암대사의 비로 높이 213cm,폭110cm,두께35cm,이다.

이 비석은 자연석암반위에 흠을 파서 세운 것으로 법주사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벽암대사 는 보은 출신의 고승으로 인조 2년에 법주사를 중창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려를 동원하여

축성 작업을 감독하였다.

병자호란 때 에는 남도에서 승병 수천명을 모집 북진하다가 전쟁이 끝난 것을 알고 승병을 해산하고 입산수도 하다가

현종 원년 에 화엄사에서 입적 하였다.

 

 

물과 녹음이 어울어진 수로가 참 깨끗하다.

 

 

졸졸졸 흐느는 계류가 발을 담그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솟아 난다.

 

목조건축이다, 한옥의 은은한 기품이 우러나는 이렇게 아름다운집 을 지어 놓았네...

 

최근에 지은듯한 목조건축물이 아름답고 소나무 향내가 나는듯 하다.

 

 

한옥은 언제보아도 편안하고 아름답다.

 

나무 향이 나는듯한 목조건물의 외관모습도 멋스럽다.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心礎石)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건물은 2단의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의 각 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건물의 외관은 층이 높아지면서 주간(柱間)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遞減)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공포의 짜임은 금산사 미륵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에서 볼수 없었던 특수한 방식으로 1층은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2층 이상은 다포식(多包式)이다.

 

금입상을 한 금동미륵대불부처님이 천왕문지붕위로 보인다.

 

마당에 범종각과 많은 유물이 모여져 있다.

 

팔상전과 금동대불리륵부처님

 

청동미륵대불(靑銅彌勒大佛) 

신라 혜공왕(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여에 걸쳐 노력한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는데

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몰수해 갔다고 한다.

1939년 다시 조성되다가 6.25로 80%의 공정상태에서 중단된 불상은 1964년 시멘트 미륵불로 완성되었다.

1986년 붕괴위험으로 해체되고 4년뒤인 1990년 다시 청동미륵불상으로 복원되었다.

2002년 월드컵 성공개최와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2년여의 노력으로 청동녹을 벗겨내고 순금 3㎛두께로 황금 80Kg 을들여

2002년 본래의 금동미륵불상으로 복원된 셈이다.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이다. 조성연대는 성덕왕(서기72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등은 부처의 자비로 명랑한 생활을 하며 여러가지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하여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유물에 사자를 조각한 것은 삼국시대 이래 많은 예를 볼수 있으나 현존하는 석탑, 석등에 조각된 사자상 중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다른 석등에 비해 불을켜는 화사석과 그 위를 덮는 지붕이 큰 것이 특징이다. 

속리산 법주사의 대웅보전 이다.

   

금도대불미륵부처님의 옆모습.

  

영정각 내부이다/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모셔놓은 전각이다.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당간이란 절 앞에 세워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고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당이라 불리는 깃발을 달아 두기 위한 것인데

만든 재료에 따라 철 당간, 석당간, 목당간으로 불리우며, 간두의 모양에 따 라 용머리 모양을 취한 것을 용두당,

여의주를 장식하면 여의당 또는 마니당, 사람의 모양이면 인두 당이라 하였다.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목종(1006년)에 조성된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고종(1866년)에 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이곳 철당간은 22미터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된 것이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수리중인 건물은 사천왕문이다.>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팔각의 받침석위에 삼단의 굄석과 한층의 복련내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연지를 떠받아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중 걸작품 으로 팔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천재적인 조각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높이 난간의 짧은기둥 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세상의 현실은

서로가 시기하고 모함하는 연못의 흙탕물과 같은 세상 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생활하면

내 세에는 극락세계에 타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적인 교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석조(法住寺石槽)

  이 돌로된 커다란 통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긴 네모꼴의 큰물통 이다.

높이 94쎈티미터 길이446쎈티미터 폭240쎈티미터 이다.

신라 성덕왕(서기720년)에 만든 것 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법주사의 3,000승려가 물을 저장하고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에 불경구절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들의 존호가 새겨져 있다.

   

법주사 에서 내려오다 보이는 곳에는 부도가 있다.

   

여기는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다.ㅎㅎㅎ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높이 약6미터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마애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磨崖佛:암벽에새긴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길고 큰직한코, 둥근눈섭, 뚜렸한 눈두덩, 꽉다문 두꺼운입술 등은 길다란 삼도(三道)의 표현등과 함께

고려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 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이 불상의 오른쪽에 오목새겨진 마애조각은 선사시대 암각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였다는

법주사의 창건설화와 관계가 있는 암각화로 추정하고 있다.

 

계곡물이 너무도 깨끗해서 물이 흐르는지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

   

계류를 따라 이어지는 수목들이 참 아름답고 고즈넉 하다.

 

포장된 하산길 옆에 이렇게 흙으로된 길이 있어서 나는 참 좋더라~!

   

지금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냥 모래만 보입니다그려~

   

 

천천히 내려오는 길도 참좋더라~~~~!

   

내려오다 보니 예사롭지 않은 바위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무슨 전설같은것이 있을것 같은데...??

 

  

                                                   여기는 법주사 입니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우선 만나는 것이 이 비각입니다.  우리가 일주문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고 산에서 내려온

         것이기에 제일 먼저 만난 문화재입니다.  시간이 없어 사진 담는 것만 초점을 두고 담아

         보았습니다.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비. 비신 높이 163㎝, 너비 65㎝.

         속리산의 내력과 관련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법주사 수정교 앞의 보호각 안에 있다. 

         1665년(현종 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과 수정봉(水晶峰) 위의 거북바위에 대한 속설(俗說)을 소개

         하면서 미신의 타파를 주장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정봉은 법주사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그 정상의 흙이 붉은데, 그 까닭은 본래 수정봉 위

         에는 천연적으로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중국의 술객(術客)이 와서

         거북의 머리가 중국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번쩍 쳐들려 있는 형상임을 보고, 중국의 재화

         (財貨)를 모두 실어내갈 영물(靈物)이라고 하면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

         층탑을 세워 기운을 진압했다.

 

         그 때 거북이 흘린 피 때문에 흙이 붉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1653년(효종 4) 옥

         천군수 이두량(李斗梁)은 다시 거북의 머리를 붙이고, 1665년 충청병사 민진익(閔震益)은

         탑을 부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신적 행위로 경계한 내용이다.』  -옮긴글-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住寺 碧巖大師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住寺 碧巖大師碑) 옆모습

 

         안내판에서 전문을 옮겨 봅니다.

 

         『조선 헌종 5년(1664)에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높이 213cm, 폭 110cm, 두께 35cm이

         다.  이 비는 자연석 암반위에 홈을 파서 세운 것으로 법주사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벽암대사(1575~1660)는 보은(報恩) 출신의 고승으로 인조 2년(1624)에 법주사를 중창(重

         創)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려를 동원하여 축성 작업을 감독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남도에서 승병 수 천명을 모집 북진하다가 전쟁이 끝난 것을 알고 승병을

         해산하였고, 입산수도하다가 현종 원년(1110)에 화엄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가람배치 안내

                                                     법주사 가람배치도

 

         법주사(法住寺)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 속리산(俗離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

         계종 제5교구 본사입니다.  법주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미륵대불과 팔상전입니다.  그렇기

         에 이곳은 미륵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주사의 창건

 

 

         『법주사는 의신 조사(義信祖師)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

         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

         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진표 율사

         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

         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吉祥寺)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습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

         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

         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법주사 홈페이지에서-

 

   

                                         법주사로 들어가는 수정교 모습입니다.

 

         법주사의 중창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에 중건

         되었으며 고려에 와서는 태조 1년(918)에 왕사(王師)인 증통 국사(證通國師)가 중건하였습

         니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

         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에 벽암 각성(碧岩覺性)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

         을 기울였습니다. 벽암 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합니

         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

         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기록되어 웅장한 규모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예불용 전각 등 중요 건물만 발췌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웅대광명전 (2층 28칸). 산호보광명전 (2층 35칸), 팔상오층전 (36칸), 비로전 (17칸), 약

         사전,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 지장전, 연경전, 영산전, 도솔전, 응진전, 대양문 (7칸),

         천왕문, 조계문, 해탈문, 동행랑, 서행랑

         임진왜란 이후 벽암 선사의 일대 중창에도 불구하고 복구된 건물의 수는 20여 동에 불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법주사 홈페이지에서-

 

 

 

   

                                                        금강문(金剛門)

 

         이 문은 법주사로 들어가는 둘째 관문입니다.  첫째는 물론 일주문이죠.  여기엔 금강역사

         (나라연금강, 밀적금강), 혹은 인왕역사(仁王力士)라 불리는 호법신장과 사자를 탄 문수보

         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안치되어 있는데 보수공사를 하는지 비계가 설치되어 어수

         선하고 사진에 담았으나 잘 나오지 않아 생략합니다.

 

         금강문은 금강역사가 지키므로 금강문이라 합니다만 금강역사를 인왕이라 하므로 인왕문

         (仁王門)이라고도 합니다.   이 금강역사 혹은 인왕은 이 문 안에 절대로 삿된 무리들이 범

         접하지 못하도록 떡 버티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불법을 깨뜨리려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데!!!  작금의 현실을 보면 금강역사가 소임을 다하지 못했는지 삿된 무리들이 들어와

         방화를 자행하고, 낙서, 방뇨를 하는 등 온갖 죄악을 짓고 있으니 저 가엾은 중생을 어찌

         할꼬... 금강역사의 주먹맛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 불자들이 각기 금강역사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왕문(天王門) 앞의 거대한 두 그루의 전나무

 

         금강문(金剛門)을 통과하여 천왕문(天王門)으로 향하니 거 대한 두 그루의 나무가 턱 버티

         고 있는데 마치 수호신장과 같았습니다.  무슨 나무인가 했더니 전나무라 했습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전나의 위용에 압도되는 듯했습니다.  사진이 좀 밝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

         입니다.

 

 

 

   

                                    천왕문(天王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이 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토록 하였

         고, 좌우에 사천왕상을 안치했습니다.  법주사 사천왕문은 국내 최대의 규모라 합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상에 그물을 씌워 새나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 바람에 사진

         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이 있어 두 개만 올렸습니다.  용을 잡고 있는 광목천왕과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입니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를 들고, 인간세상의 기쁨의 강정을 주관하고,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인간세상의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고, 서방의 광목천왕

         (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은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고 합니다.

 

 

   

                                                 미륵대불을 뵈옵니다. ()()()

 

         우선 대불을 뵈옵고 예를 올린 다음 대불의 오른편쪽, 제가 바라볼 때는 왼쪽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찾았습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보물 제216호

 

 

                                   법주사 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높이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상의 성격을 일러주는 미륵불상으

         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磨崖佛)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로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

         은 길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넓은 어께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이 불상의 오른쪽에 오목 새겨진 마애조각은 선사시대 암각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의신조

         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였다는 법주사의 창건설화와 관계되는 암

         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의 오른쪽에 오목 새겨진 마애조각은 선사시대 암각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의신조

         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였다는 법주사의 창건설화와 관계되는 암

         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워낙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삼배를 드리고 사진찍기에 바빠 주변의 다른 곳은 확인하지 못

         했으니 후일을 기약해 봅니다. 

 

         마애불을 참배하고 왼쪽 주변을 돌아보니 수정암 가는 길에 부도전이 보여 얼른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하고 찾아 보았습니다.

 

   

                                                          부도전 모습

 

         여기엔 부도 2기와 4기의 탑비가 세워져 있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석상대종사(石

         霜大宗師)와 금오선사(金烏禪師)의 부도와 탑비 등이었습니다.

 

 

   

                                             대종사석상지탑(大宗師石霜之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찰각형 하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옹기형 탑신을 올리고 그 위해 팔

         각옥개석을 올렸습니다. 탑신 중앙에는 '대종사석상지탑(大宗師石霜之塔)'이라는 명문을

         새겨 탑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려 줍니다.

 

         석상신수(石霜信首,1872~1947)스님은 12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며 도제양성과 중

         생구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석상스님은 1928년부터 1940년까지 12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했는데 이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 김복진으로 하여금 ‘미륵대불’을 조성하도록 했고, 가산 김영곤 불자와 뜻을 같이

         해 ‘세계에서 제일 큰 미륵불상’ 조성을 추진했습니다.  이때가 1939년 3월로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수탈하던 시기였습니다.  미륵대불을 만들게 된 것은 절망에

         빠져있던 조선인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금오당태전지탑(金烏堂太田之塔)

 

         사각지대석을 5층으로 올리고 그 위에 보련과 앙련의 연화대를 놓은 위에 팔각대석을 놓

         은 위에 둥근 돌의 탑신을 올리고 탑신 위에는 보주를 올렸습니다.  탑신 중앙에는 '금오

         당대전지탑(金烏堂太田之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오대종사부도비(金烏大宗師浮屠碑)

 

         금오 태전선사(金烏 太田禪師)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은 법주사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나아가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님이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고 하

         겠다.

         스님은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동래정씨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

         는 금오(金烏), 그리고 법명이 태전(太田)이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았지만 뜻이 다른 데 있어 공부에는 열성이 없었다. 스님이 태어났

         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격동의 연속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개혁으

         로 온 나라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으

         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억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반봉건체제 하에서 서구 열강과 일

         본의 침략 야욕은 조선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있었다. 스님은 이러한 때 유년 시절을 보

         내며 일찍부터 불도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2년 3월 마침내 스님은 15세로 금강산 마하연사에 출가하여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

         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 율

         사를 계사(戒師)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 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사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

         덕사의 보월(寶月)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 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

         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

         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

         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

         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

         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

         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

         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

         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10월 8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

         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제자로는 불국선원의 조실인 월산(月山)

         스님을 비롯해서 월주(月珠) 스님, 월탄(月誕) 스님 등 수십 명에 달한다. 이 분들에게서 다

         시 법을 이은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

         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전통사찰총서에서-

 

   

                                               부도전에서 바라본 바위 모습

 

         이 거대한 바위는 법주사의 명물로 여겨집니다.  바위 앞쪽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도를 참배하고 다시 대불쪽으로 나오니 적멸보궁이 있어 참배하고자 들어갔습니다.

 

   

                                                 능인전(能仁殿) 입구

 

         능인전은 담장이 쳐져 있고 대문을 만들어 출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출입이

         제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출입이 허용된 모양인지 아무런 표시가 없었습니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일명 능인전(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대문에 들어서니 적멸보궁이란 현판이 있습니다.  이 전각 옆에는 사리각이라는 건물이 나

         란히 있습니다.  법당에 들어 얼른 참배하고 보니 삼존불상과 16대아라한상이 좌우로 모

         셔져 있었습니다.  적멸보궁엔 원래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데 모셨더군요.  원래 능인전

         이라 했기에 모신 것 같습니다.  이 능인전을 지금은 적멸보궁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능인전(能仁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

         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합니다. 

 

 

 

   

                                                         삼존불(三尊佛)

 

         여기 모셔진 중앙의 부처님은 수인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인 것 같습니다.  좌우엔 석고로

         두 부처님을 모셨는데 어느 부처님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비로자나불이라면 대개 노사나

         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십니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것은 중앙의 부처님 뒤로 광배가 있을 자

         리는 창을 내어 사리탑을 보며 참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존불 좌우에는 16아

         라한상을 모시고 있음을 봅니다.

 

   

                                               16대아라한 중 좌측의 성중들

 

 

   

                                               16대아라한 중 우측의 성중들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

 

 

         『이 부도탑은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에 만든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석가여래의 사리

         를 봉안하고 있는 이 사리탑은, 당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이곳 법주사에 왕림했을

         때에 경상남도 양산군에 있는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어 거기에 봉안된 석가세존의 사리 일

         부를 모셔오게 하여 이곳에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기단부 위에 탑 모돌을 얹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기단석의 윗 면을 경사지게 깎아 그곳에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보이는데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고려 말기의 사리탑이다. 전체의 높이는 311cm이다.』

                                                                                                  -안내판에서 옮김-

 

 

   

                                                    당간지주가 있는 정경

 

 

 

                   

                                                           철당간(鐵幢竿)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 찰(찰) 또는 찰주(찰주)

         로 불리는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를 말합니다.  여기에 당간지주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그 전문을 옮겨 봅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이란 달리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

         함은 절(寺)에 당간, 즉 찰(刹)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宗派)를 표

         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 표시하는데 쓰이

         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고려 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

         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 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당백전(當百錢)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

         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

         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

         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는 1400년전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24년째인

진흥왕 14년 (서기 553년)에  의신조사가 세웠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불상전 가운데 하나인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종고루, 부도전 등 5개의 부속건축물,

그리고 선원, 강원, 염불원 등 3개의 원과 

또한 염화당, 용화당, 미룡당, 응주전, 사리각, 종무소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도합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법주사 일주문

 
 

속리산사 실기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7호

법주사(法住寺)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 사람들도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1653)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법주사 천왕문

 
 

팔상전

 

팔상전(국보 55호)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 목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에 의신이 세웠고,  776년 병진이 중창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1984년에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3층 목조탑이 소실됨으로써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전체 높이가 상륜까지 22.7m 이며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중 제일 높은 것이다.


법주사 청동 미륵불상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법주사 철확

 

높이1m20cm 둘레가 10m

우리나라 전래 솥 중에서 가장 큰 솥으로

옛 신라 성덕왕때 3천승도가 운집하였을때 사용하던 솥


 

법주사 범종각

 
 

법주사 약사전

 
 

쌍사자 석등

 

쌍사자 석등(국보 5호)은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중의 하나로

그 조성년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등의 간주석을 석사자로 대치한 이 석등은 전형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대 방석을 모두 하나의 돌에 조각한 것으로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사천왕 석등

 

사천왕 석등(보물 15호)은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재위)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던 때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법주사 명부전

 

진영각

 

명부전과 나란히 서 있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법주사 희견 보살상

 
 

법주사 원통보전

 
 

석연지

 

석연지(국보 64호)는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굄과  한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을 조식한 걸작품으로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철당간지주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

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법주사 마애불상

 

법주사 경내 암벽에 부조된 고려시대 마애불상.

보물 제216호.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 밑에 계주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근형으로 살이 쪘으며,

 턱 밑의 주름과 짧은 목에 표현된 삼도(三道)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눈꼬리가 길게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납작하게 눌린 듯한 코는 살찐 뺨에 파묻혀 있는 듯하다.

 상체는 두 어깨가 각이 진 편으로

 허리가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을 입고 있다.

두 무릎 역시 어깨처럼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비례로 보면

 하체가 허리와 상체에 비해 매우 빈약하지만

밑에서 올려다보면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는 것 같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얼굴을 제외한 신체 각 부분의 묘사가 평면적이며

옷주름은 거의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불신의 윤곽선,

손가락의 묘사,

연화대좌의 꽃잎 형태는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회화적인 곡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려불화 가운데

 1350년에 제작된

〈미륵하생경변상도〉(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의 본존불과

세부표현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으므로

이 불상조성의 신앙적 배경으로 미륵신앙이 주목된다.

 이 불상의 수인인 설법인은

현존하는 한국 불상 가운데 드문 도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에서 볼 수 있으며,

의상의 자세는

경주 남산 삼화령 출토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불의 예가 있다.

 

 

*.문화재도 보지 않는데 멀리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은

불법이 아닌가요?

 

ㅇ. 우리나라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는 청자, 불상 등 개별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점

단위 문화재가 있는가 하면, 사적, 명승, 사적 및 명승, 천연기념물(천연보호구역 포함),

문화재자료, 지방기념물 등 면 단위 문화재도 많습니다.

일반적 인식인 점 단위 문화재만 생각하면, 위의 질문이 타당하지만,

면단위 문화재를 고려하면 상황은 달리 인식해야 합니다.


ㅇ. 2008년 7월 현재, 국립공원 내에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고 있는 곳은 22개 사찰이며,

이중 최근의 문화재관람료 징수와 관련한 갈등을 겪고 있는 사찰은 14개소입니다.

14개 사찰 중 사찰 내 부속 건물이나 석탑, 불상 등에 한해 지정된 점 단위 문화재가 아닌,

사찰소유 토지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면단위문화재가 9개소에 달합니다.

즉, 사적 및 명승(해인사, 법주사, 화엄사), 천연보호구역(신흥사,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문화재자료(천은사, 도갑사), 지방기념물(내장사, 내소사, 쌍계사) 등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ㅇ. 비단 이렇게 면단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문화재와 그 주변은 반경 500M 이상의 영역이 현상변경허가대상구역으로 지정되어 문화재와 거의 동일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재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 및 경관과 하나 되어 존재해야

비로소 그 역사적·경관적·예술적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ㅇ. 그러므로 사찰 경내에 진입하면 청자, 불상, 석탑, 대웅전과 같은 수려한 건축물 등은

보이지 않아도 실제로는 문화재(구역) 안에 혹은 문화재보호구역 내에 들어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작성부서 :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 활용정책과, 042-481-4744

 


*.안내

가람배치

 

법주사의 가람배치도 입니다. 클릭하시면 사진과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람배치 안내 

찾아오시는길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 고스란히 간직한 오늘날 이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

법주사 오시는 길입니다. 아래 오시는길 내용을 확인하세요

서울에서 오시는 길

경부고속도로(105.8km) → 청원JC(청원·상주간 고속도로) →

1코스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말티고개 직진 → 속리산법주사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 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2코스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강릉에서 오시는 길

영동고속도로(176Km) → 호법분기점(중부고속도로)(77Km) → 남이분기점(경부고속도로)(22Km) → 청원분기점(62.5Km) →

1코스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2코스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부산에서 오시는 길

남해지선 고속도로(19.6Km) → 남해고속도로)(17.1Km) → 창원JC(12.3Km)마산 외곽도로 → 칠원JC(135.4Km)중부내륙고속도로 → 낙동JC(44.3Km)청원상주간 고속도로 →

1코스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2코스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광주에서 오시는 길

동광주IC호남고속도로(104Km) → 논산JC경부고속도로(72.5Km) → 청원JC청원상주간 고속도로

1코스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2코스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버스로 오시는 길

서울
남부터미널 - 속리산행 버스(3시간 30분 소요) 일일3회
동서울터미널 - 속리산행 버스(3시간 30분 소요)일일 13회
(서울에서 오실 때는 청주까지는 오는 차가 많이 있으니, 청주에 오셔서 환승하시는 것이 편합니다. 속리산행 버스도 청주에 정차합니다.)

청주 속리산행버스(1시간 30분 소요) 첫차 06:40/막차 20:40/일일26회

동대전 속리산행버스(1시간 30분 소요) 첫차 06:30/막차20:40/일일 11회

대구, 부산, 광주 대구, 부산, 광주 → 대전 → 속리산행 버스

 

문화재구역 입장료 안내

속리산 국립공원 입장료는 폐지가 되었지만, 법주사는 문화재 구역으로 관람료가 있습니다. 법주사 일주문을 통해 문장대를 가시거나 법주사에 가시는 분은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문화재구역 입장료

 

구분 문화재구역 입장료
어른 (19~65) 개인 4000원
단체 3700원
청소년/학생/군인(13 ~ 18) 개인 2000원
단체 1600원
어린이 (7~12) 개인 1000원
단체 800원

 

 

* 조계종 신도증이 있으면 무료

주차안내 : 법주사까지 차로 오실 수 없으며 주차는 속리산 입구에 유료 주차 후

                걸어 올라오시면 됩니다. 주차장에서 법주사까지 0.9km 약 15분소요

* 문화재관람료는 문화재보호법 제48조(문화재공개), 제49조(관람료 징수)에 의거

                         문화재소유자, 관리자, 관리단체 등이 부과할 수 있습니다.

 

 

식당소개

▶.덕림산채식당(덕림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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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소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287(사내리201-1)
전화번호 :
043) 543-4846

소개글

소개글이미지

저희 식당은 맑고 공기 좋은 속리산의 상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항상 손님의 편의를 생각하고 있으며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최고의 맛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주요메뉴

산채정식, 버섯찌개정식, 능이전골정식, 불백정식 산채비빔밥 등

차림표

차림표
정식 일반식 덕림부침 덕림안주
덕림정식 산채된장찌개 도토리묵 버섯전골
산채정식 산채된장찌개 해물파전 올갱이찌개
더덕구이정식 돌솥비빔밥 감자전 더덕구이
버섯찌개정식 돌솥비빔밥 녹두전 제육볶음
능이전골정식 산채김치찌개 고추전 토종닭도리탕
산채불백정식 표고덮밥 버섯파전
송이전골정식
송이불백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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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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