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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건누리길 2구간 2-1(고진감래길), 2-2(호연지기길)

최두호 2017. 11. 21. 12:31

 

 

 

 왕건 누리길 2구간

 언제 : 2012년 4월1일 일요일(맑음)

 어디를 : 왕건누리길2구간

             ( 백안동 - 갈미재 - 평광동 - 첨백당 - 재바우농원 - 담낭리 - 옻곡재(옻골재) - 요령봉    (어지럼바위,요령산장) - 매여동 버스종점 - 산림욕장 - 낙타봉(독수리봉),

            초례봉갈림길) - 초례봉 - 포토존 - 동곡지 - 신서혁신도시(첨단의료 복합단지) - 반야월-  지하철 안심역(16Km) 

 

 

 

 

 

 

 

 

▣ 왕건누리길2구간 (2-1(4.3km) 고진감래(苦盡甘來)길)

     백안삼거리 - 백안산장 - 동화천 - 갈미재(갈미터널) - 돼지코길 - 새터마을 -평광지

- 평광동 버스종점 

 


☆ 참조 (팔공산하http://www.imaeil.com/palmount/index.php?page=news_19  )

제19대 4.11국회의원 총선 열풍이 이곳 백안삼거리에서도 한창입니다.잘~~되야될낀데...

 

백안산장 우측뒤로 해서 동화천 다리를 건넙니다.

 

 

 

 

 

동화천변의 백안쉼터

 

 

 

고진감래길의 초입

 

 

 

 

 

갈미재 오르기전의 깔딱재인데 그렇게 심한 깔딱은 아니고 약간숨찰정도....

 

갈미골의 갈미재(갈미터널)

백안동과 평광동을 이어주는 길목역할을 하는 갈미재. 문암산(기산)에서 올라와 이곳갈 미재를 지나 환성산으로해서

새미기재,대암봉 그리고 용암산성으로 하는 환성산 환종주길 이기도 하고 갈미재 아래로는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지나갑니다.

 

능선상에 난데없이 세워진 돼지코가 뭘까 하고 의아해했는데 길이 돼지코형상를 그리며 조성되어서 그렇게 황당한 이름을 지어놓았네요 차라리 좀더다른 테마를 만들어놓던지 ㅉㅉㅉ

 

부드러운 휠링 송림길

 

새터마을로 다운합니다

 

새터마을의 농로길

 

 

 

대구올래 팔공산 4코스 - 평광동네길 이기도 합니다.

 

 

 

 

 

평광지에서 안쪽으로 쭉올라가면 시량리이다.

(☞실왕리失王里 실왕리는 왕건의 공산전투를 이야기할때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후백제가 신라말에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의수도 경주가 함락직전에

신라에서 왕건의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왕건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불로,봉무,소재의 파군재에서 접전으로 고려 왕건이 크게패하고 이 마을에서  임금을 잃은 곳이라 실왕리(失王里)라 전해왔다.

조선조 말 수치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시량리(是良里)'로 고쳐부르고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현재 '시량리'와 '시랭이' 불려지고 있으나 '시량리'가 정확한 표현이다.

 

 

※tip : 효자 강순항 정려각과 신숭겸장군 영각 유허비    

 

 

(▷참고 효자 강순향 정려각) 


옛 달성군 지역인 동구 평광동에 가면 아름드리 왕버들나무와 함께 한 효자각이 방문객을 맞고 있다.

 대구시 동구 문화재 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는 효자강순항정려각(孝子姜順恒旌閭閣)이다.
비각 내부에는 `효자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강순항지려(孝子崇政大夫行同知中樞府事姜順恒之閭) 숭정기원후사을미십일월일(崇禎紀元後四乙未十一月日)’ 이라고 새겨진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30년(조선 순조 30년)에 세웠으며 높은 벼슬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효자 강순항의 나이가 100세에 이르자 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 벼슬을 하사받았고, 이에 따라 그의 부인과 조상 3대가 각종 관직을 거슬러 올려 받게 되어 새로이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백수를 누린다는 것은 타고난 복도 있어야 하지만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로 보아, 욕심내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정려각 건물의 규모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로 매우 소박한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 구조와 모양으로 볼 때 기록으로 남겨 오래 기리기는 하지만 크게 자랑은 하지 않는다는 겸손함을 보이고 있다. 강순항(姜順恒, 1745-1830)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가난한 형편임에도 부모에게 지극한 효행을 행하여 이웃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는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문득 참외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강순항은 엄동설한에 어디에 가면 참외를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당시 참외농사를 많이 짓던 강가 마을인 방촌동으로 가서 몇날 며칠 두엄더미를 뒤졌다고 한다. 참외덩굴을 걷어 두엄더미에 쌓아둔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냄새가 많이 나는 두엄더미 속에서 노랗게 익은 참외를 찾아내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다. 쌓아둔 덩굴 속에 처음에는 제대로 익지 않아 새파랗던 참외가 그동안 더미 속에서 줄기가 썩어가는 중에도 열을 받아 노랗게 익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또 어느 날은 잉어가 먹고 싶다하여 추위도 마다않고 낚시를 하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었다. 얼음을 깨자 바로 잉어가 튀어 올라왔다고 한다.

어느 해 여름에는 아버지가 쇠고기 국이 먹고 싶다 하여 강순항은 얼른 나뭇짐을 지고 해안장으로 쇠고기를 사러 갔다. 얼른 쇠고기 국을 드리려고 나무를 헐값에 팔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려니 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서 잠시 개울에서 세수를 하려고 막 지게를 벗어 놓는데 그때 마침 지나가던 독수리가 쇠고기를 낚아채 가버렸다. 강순항은 잠시 낙심하였으나 얼른 집으로 돌아와 다시 나뭇짐을 지고 시장에 가리라 마음먹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이미 국을 끓이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마당에 나섰는데 마침 독수리가 날아와 쇠고기 덩이를 떨어뜨렸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새 조차도 그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강순항의 지극한 정성도 아랑 곳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보살피니, 마침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고 벼슬이 증직되었던 것이다.

대구시에서는 마을 입구 효자각 앞에 우뚝 서있는 왕버들나무를 `효자 강순항 나무’로 명명하고, 그의 효행을 기려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고 있다. 대부분의 효자 효부 이야기가 다소 검증이 되지 않는 일화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나,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다는 사실만을 부인할 수 없을 듯싶다. 둘레의 사람들이 공감을 해야만 정려각이 세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효자각 내용에 다소 비과학적인 점이 있다하더라도 그 정신적 가치는 소중하며 오늘날에도 존중되어 마땅하다. 그것은 백행지본인 효도를 행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진실 되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모영재(慕影齋, 平山 申氏) 

 소재지 : 동구 평광동 108

 

 이곳은 원래 장절공의 영정각(影禎閣)이 있던 곳입니다.

장절공의 영정은 본래 지묘사에 봉안되었었는데 지묘사가  헐린뒤에 대비사로 옮겨져

봉안(奉安)되었다가  절과 영정이 불타 버렸습니다.  

 

    이 재실은 1931년 高麗(고려) 開國(개국) 功臣(공신)인 壯節公(장절공) 申崇謙(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매년 음 9月 9日에는 申氏門中(신씨문중)에서 合同(합동)으로

享祠(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재실 바로 곁에 있는 高麗太師壯節公 申公影閣遺墟碑(고려태사장절공 신공영각유허비)는

원래의 것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1833년 후손인 承政院(승정원) 都承旨(도승지) 申正緯(신정위)가 새로세워 碑文(비문)을

 撰(찬)했으며 1848년(憲宗, 헌종 14)에 儒林(유림)에서 碑(비)를 保存(보존)하기

위하여 碑閣(비각)을 세웠다.1966년에 또 한차례 重修(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慕影齋(모영재)는 影閣(영각)을 追慕(추모)한다는 뜻이다.

    방 3칸, 대청 1칸에 박공판을 단 맞배지붕으로 중방 밑은 모두 콘크리트로 막고 있다.

  

       


 

신숭겸 영각 유허비 [申崇謙 影閣 遺墟碑]

 대구 동구 평광동에 있는 고려 초기의 장군 신숭겸의 유허지에 세운 비이다. 표충제 평산신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대구 동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927년(태조 10) 후백제 견훤군과의 싸움에서 

숨을 거둔 신숭겸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씨 가문에서 영각이 있던 곳에 1832년(순조 32)에

 건립한 석비이다. 1848년 유림에서 비각을 지었으며 1930년에는 4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갖춘

모영재()라는 재실을 그 앞에 지었다. 2008년 4월 10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되었다. 

 

 

 

 

 

 

 

 

 

 

 

 

 

 927년 지묘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공산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왕건은 불로동과 도동을 거쳐 평광동까지 이르게

되는데,마을 어귀에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고 힘을내어 도피한다. 왕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나무꾼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누볐으나 결국 찾지못했고, 그 부근에서 왕을 잃어버렸다 해서

실왕리(失王里)라 부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시랭이,시랑이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평광동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영각인 모영재에 이르는 길이 왕건의 도피처로 추정되며,

 왕건임도라는 별칭을 갖고있다.

 (일부 학자들은 왕건이 이곳 시량이로해서 옻곡재 요령봉을 넘어 매여동 으로 도주하여 이후 초례봉 반야월

안심을 지나 앞산방향으로 도주한것으로 추정하고있다)

 

 

 

 

 

 

 평광종점의 왕건길 표석

 

 

 

 평광동 버스종점 여기서 좌측고개를 넘으면 평광지이고 우측다리건너 진행하면 첨백당방향이다.

 

단양우씨 평광 유허비

 

 

 

 

 

 

왕건누리길2구간 (2-2 호연지기길)

(평광동 버스종점 ~매여동 버스종점 4.5km)

 

왕건 누리길2-2 호연지기길 트래킹 경로 : 평광종점 - 첨백당 - 재바우농원 - 옻골재 -요령봉 - 요령산장 - 매여종점



 

 

 

 

 와룡정(臥龍亭)

조선후기의 정자로 단양우씨(丹陽 禹氏)의 선조인 용재공(龍齋公) 우명재를 봉향하기 위해

고종16년(1879)에 건립되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 건너편 산속 후미진곳이었다.

후대에 와서 정자가 너무 외딴곳에 떨어져 있어 관리가 불편하다하여 1966년 현 위치로 이건

하였는데 와룡정이라 하게된 연유는 동네 어귀 냇가에 와룡지처(臥龍之處)가 있다고하여

골안이름과 아울러 와룡정이라 하였으며 후대 서당으로 활용했다.

 

 

 

 

 

 

 

 

 경희정(景喜亭)

이 재실은 단양 우씨(丹陽禹氏) 평광동 세거조(世居祖)인 우익신(禹翊臣)의 10세손인

만희재 영석,11세손인 단봉 규환,12세손인 운제 효봉을 위하여 삼대의 추원정(追遠亭)으로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것이다. 만희재는 경사에 박섭하고 위선사에 유성하였으며 후진

교육에도 힘써 수통정대부가 되었다.한편 단봉은 관위원으로 식견이 풍단하고 시문에

능통하여 경향사우가 출중하였고 문집을 남기고 있다. 운재는 품성이 강명하고 규도가

엄정하며 덕망이 높았으니 기호동지와 같이 낙육재에 거처하였으며 1913-1914년에

독립군자금 사건으로 일경에 피체되기도 하였다.

 

 

 

 

 

 

 

 

 

 

 

 

첨백당 앞마당에는 1945년 해방을 기념하여 민초들이 심은 광복소나무

 

첨백당 앞도로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홍옥사과나무가 있는 재바우농원이 나온다.

 

 

 

 1970년대 대구 사과가 명성을 날리던 시절 대구시의 대표적인 예찬곡이 ‘능금꽃 피고 지는 내 고향 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으로 시작하는 길옥균 작사 작곡, 패티김 노래의「능금꽃 피는 고향」이다. 
벌써 30~40년이 지난 오늘 날, 팔공산은 그대로이나 사과나무의 주산지는 안동, 청송, 봉화, 문경 등 경북 북부지방과 충주

등으로 옮겨가 버렸다. 
세월이 흘렀다고 그 명성이나 역사마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팔공산 자락 대구 동구 평광동일대는 사과밭이 지천으로 있다. 평광동 사과 재배단지에는 140여 농가가 120㏊의

 면적에서 아오리, 홍로, 후지, 홍옥, 양광 등 8종류의 사과를 재배하고 연간 1천톤이 넘는 사과가 전국으로 판매되고 있다.
또 그곳에는 대구 능금(사과)의 역사를 말해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0년이 된 ‘홍옥’사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소유주인 재바우농원 우채정할아버지(82)의 선친이 1935년 심은 5년생 식재 사과나무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그루이다. 우채정할아버지는 “아까워서 기념으로 한 그루 남겨 놓았다”고 한다. 
이 홍옥사과나무는 아직도 가을이면 빨간 홍옥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다. 사과나무는 보통 30년, 길어도 50년 정도가

지나면 열매를 맺지 못해 베어 버린다고 한다. 끈질기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대구 능금의 전통을 전해주는 대단한

 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사과의 역사는 1899년 가을 미국 의료 선교사인 닥터 존슨(초대 동산병원장)이 미국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 묘목 72그루를 가지고와서 동산병원을 신축하면서 선교사 사택(현 선교사 박물관) 뒤뜰 정원에 심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 나무들은 모두 고사하고 미주리 품종에서 떨어진 씨앗이 싹을 피워 유일하게 한 그루 현재까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현재 대구시 보호수 1호이며, 대구가 사과의 고장이 된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평광동에서 옻곡재로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의 일종의 대문에 조금전 지나간것으로 보이는 여인네의 영역표시가 선명하네요 나~~~참 어이상실 꼭이런데서(별로사람도없는 산중) 궁디까야 되는겨?

 

 

 

 

 

 

 

 

 

 

 

 

 

  

 

 

 요령봉은 매여동 하산길에 밑에서 보면 요령(불교에서 의식을 행할 때 흔들어 소리를 내는 법구 가늘고 긴 쇳대 아래 종이 달렸있다)을 닮았다헤서 요령봉이라한다,

 

요령봉에서 매여동방향 지도

  

 어지럼바위라고 하네요(일명 요령산장인디...)

 

전에 몇몇 산우들 사이에서 이바위석굴을 요령산장이라 불렀습니다.

 

 

  

 

 

매여동 마을 정자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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