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황관호텔 아침에...
황관호텔에서 뷔페식으로..
토와에서 집안 광개토대왕비를 향해서..
잠시 대나무섬유 쇼핑장으로..
쇼핑후고 집안으로 창가에 해바라기꽃이..
담 넘어에도 옥수수가..
마을 풍경..
잠시 휴게소에서..
장뇌삼을 파는 중국 상인들..
그늘을 찿아서,,
오녀봉 입구..
창가에 오녀봉국가 산림공원이라는 안내판이..
고구려시절 체석장이라내요..광개토왕능,장수왕능 돌을 이곳에서...
인삼밭..
인삼밭이..
길옆에 기차가...
과일 노점상들이..
다시 기차를..
집안 시가지..
집안 박물관이..
길건너 연꽃 밭이..
광개토대 비(호태왕) 주차장에도착..
광개토대왕 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인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로써,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이라는 광개토 대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불린다.
호태왕비(好太王碑)는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1883년일본군 사코 가게야끼 육군 중위가 3년간 연구 후
탁본을 일본에 가져 감으로써 비분 내용이 알려 지게 되었으며,
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소똥등을 발라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비문 내용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한, 중, 일 3국간의 논쟁은 계속 되고 있다.
비석의 높이가 6.39m, 무게가 37ton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
414년(광개토 대왕 사후2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 자연석으로 비석의 배면 너비가 1.46m, 1.35m, 2m, 1.48m로
각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개석(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라고 한다.
비석은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긴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데 총 4면 1,775자로 구성된 이 비문은 한, 중, 일 학자들에 의해 약1500여자가 해석되고 있으며,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 비문의 내용~~
1)고구려의 건국과정.
2)광개토 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
3)수묘(守墓)체계.
논란이 되고 있는 비문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내도해 파백잔△△신라 이위신민'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신묘년 기사 대목으로 △△는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였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신라를 쳐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 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1909년 모습
1927년 모습
내부에서는 사진좔영 금지라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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