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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사암,황학대,국수당해송,죽성왜성,남산봉수대(봉대산228.2m)~기장군청..(펌)

최두호 2017. 11. 22. 11:51

설날 아침엔 분단위로 스케줄이 짜여진다.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다녀오는 게 교통체증과 맞물려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순서는 늘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형제들이 찾아오고 자식놈들이 다니러 와선 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차례를 지낸다.

이 또한 우리집만의 독특한 세시풍습.

그러한 세월이 어언 스무 해가 흘렀다.

손님이 다녀가고 나면 무료한 일상이 이어지고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린다.

 

그래서 다음날은 토꼈다.

내가 자유로운 세상속으로...

그 작은 나의 자유로운 세상속엔 아내가 함께 있었다.

 

다다음날, 음력 초사흘날 일요일.

아내는 집에서 푹 쉬게하고 어제 답사치 못한 곳들을 찾아 나섰다.

황학대(黃鶴臺)와 어사암(御師岩)과 죽성왜성 그리고 남산봉수대다.

그곳들은 모두 올망졸망 붙어있어서 여러모로 수월하였다.

 

 

그러한  갈맷길코스 중 두호마을~기장군청 구간은 제일 매력없는 코스.

차량의 행렬이 줄을 잇고 매캐한 매연이 코를 찌른다.

이쯤되면 힐링은 고사하고 킬링까진 아니더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그래서 흐르는 시간만이 유일한 힐링이다.

 

 

                                 

 

 

월전마을에서 장어구이 포장집들이 즐비한 해안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두모포 풍어제터'라는 자연석 비석이 나타난다.

매년 이곳에선 음력 설날쯤하여 '두모포 풍어제'를 올리고 있다.

 바로 옆에는 이도재(李道宰) 어사가 기생 월매의 진정을 받아들여 주민을 도운 기장읍 죽성리의 어사암(御史巖) 안내판이 서 있다.

 1883년 대동미를 실은 배가 침몰하자 주민들이 파도에 떠밀려오는 대동미를 주워먹다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

이를 조사하러 나온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주민들을 풀어줬대서 어사암이라 불리어진다.

안내판에는 상세히 설명 되어있다.

뒤에 보이는 이국적 풍경의 그림같은 성당은 드라마 '드림'의 셋트장. 

이 쯤에 용두암(龍頭岩)이 있다고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어  나는 '어사암'이라 새겨진 바위와 '이도재,기월매'라 새겨진 바위를 찾아 나선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사진의 제일 오른쪽 끄트머리의 서너조각이 난 바위 중앙에 희미하게 어사암(御史岩)이 새겨진 듯.('수덩이'님의 사진을 비교)

'수덩이'님은 저쪽 외딴 데 떨어져 있는 저 섬이 어사암이라 하던데...

살짝 당겨봐도...

더 당겨서 눈을 닦고봐도 없다.

              <수덩이의 산행기>에서 빌려옴.

            그 바위가 아니죠? 수덩이님의 사진엔 해풍에 닳았지만 분명 어사암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는데...(오른쪽 바위의 중앙에 희미하게 보인다.)

분명 저 외톨이라 하던데... 무심한 외톨이섬만 쳐다보다 돌아섰다.

               그리고는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에서 다시 자료를 찾아 봤죠. <자료사진엔 이도재(李道宰)와 기월매(妓月每)라 새겨져 있다.>

바위에 엉켜붙은 돌김.

                              드라마 셋트장인 성당앞의 지진대피 요령.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 기억날 리 없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이다.

작은 섬에 내려앉은 갈매기들의 한가한 오후.

황학대(黃鶴臺)다.

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7년간이나 긴 유배생활을 한 것도, 그리고 이곳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수를 남긴 것 역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조선시대 정철 박인로와 함께 3대가인으로 시조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윤선도는 30대인 1616년 당시 국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하던 영의정 등의 죄상을 밝히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경원에서 1년을 보낸 뒤 고산은 다시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생활에 들어간 고산은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짓고서 이곳을 매일 찾았다.수십그루의 노송에 쌓여 있는 황학대를 옛날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자강하류의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교했었다.<기장군 문화관광>

차성가(車城歌, 1860)』에는 “두호에 닻을 놓고 왜선창에 줄을 맨다. 황학대 어디메뇨 백운이 우유하다”라고 하여 이곳이 경승지임을 알리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토성(土城)이 강어귀를 따라 비탈진 곳에 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두모포진(수군진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지금의 동구 수정동 부근으로 옮겼다. 마을 뒷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부산시 문화관광> http://busan.go.kr/04ocean/0405history/10_04_12.jsp

 황학대엔 황악정이라는 2층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야트막한 황악대를 올랐다. 제법 넓직한 정상부위엔 소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다.

님은 가고 없지만 손에 잡힐 듯 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 아래는 고산이 지은 견회요이다.

 

  견회요(遣懷謠)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고 하나 그르다고 하나 ]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인데 ]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그 밖의 남은 일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

 

내 일 망녕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나의 일이 잘못된 줄을 내가 모를 것인가 ]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이 마음 어리석기도 임(임금)을 위한 탓이로구나. ]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아무개가 아무리 험담해도 임이여 저를 헤아려 주십시오]

 

추성(秋城) 진호루(鎭胡樓) 밧긔 울어 예는 저 시내야 [경원의 진호루 밖에 울고 가는 저 시냇물아 ]

무음 호리라 주야(晝夜)에 흐르는다 [무엇하러 밤낮으로 흐르는가 ]

님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임 향한 내 뜻을 따라 그칠 줄을 모르는가?]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산은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어 ]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버이 그리워하는 뜻은 많고 많고 ]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어 울어 가는가? ]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부터 알아마는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았지만 ]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 [임금 향한 뜻은 하늘이 만들어 놓았으니 ]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不孝)인가 여기노라.[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 불효 아닌가?]           * 견회(遣懷): 마음을 가다듬다.

 

 

황학대 남쪽 바위에 '진사 방치주' 융희원년정미추(隆熙元年丁未秋:1907년)라 새겨졌는데, 무슨 족보나 가계보 같고 또 학문을 닦는 사람도 올라있다.

* 융희(隆熙):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인 순종때의 연호

해파랑길 이정표

 

 

눈에 익은 갈맷길 리본.

 

 

해파랑길 3코스 안내판

 

 

다시 드림 셋트장.

 

 

아쉬움에 어사암으로 한 번 더 접근해서 셔터를 누르곤 마을뒷쪽 작은 동산에 보이는 우뚝선 소나무를 찾아간다.

 

 

국수당해송과 우측으로 가까이 죽성리왜성이 보인다.

 

 

이 해송은 6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큰 나무처럼 보이는 노거수로서 수령은 약 250년∼300년으로 추정된다.

해송 종류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빼어난 수형을 가지고 있으며 황학대라 불리는 죽성항 뒷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매우 뛰어나 주변에서 보면

그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웅장하다.

예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음력 정월 보름에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냈을 뿐 아니라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민속적인 유래도 깊은 곳이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문화유산>

 

소나무 사이에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이 있다.

 

 

안내판

 

 

두호마을을 내려다보면 황학대와 등대가 보인다.

 

 

다시 내려와 죽성리왜성을 찾아간다.주차장에서 쳐다보는 국수당해송.

 

 

죽성리왜성의 주차장.

 

 

                              이정표

 

 

               .

 

 

 부산광역시 기장의 죽성리 마을 해안 가까이에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는 약 960m, 높이는 약 4m이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여 수송·통신 등에 자유롭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쌓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구로다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 성은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양산의 서생포성과 울산의 학성·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성곽이 남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왜성의 윤곽이 나타난다.

 

 

왜성치곤 대체로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왜성의 축조방법은 우리와 달리 이렇게 각도를 비스듬히 쌓는 게 특색이다.

 

 

성 중심부엔...

 

 

.

 

 

본환(本丸 혼마루)이다. 일본의 성의 중핵 구역의 명칭이다.

 

 

죽성리왜성에서 바다를 쳐다본다.

남의 나라에 침범을 하여 요충지에 이렇게 버젓이 성곽을 쌓아놓고 주둔을 하였다니...

 

조금 당겨본 모습. (좌측에 황학대와 드라마셋트장인 성당과 해송이 보인다.)

더 당겨본 성당과 해송.

 

 

                                                내려오는데 길 한 모퉁이에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기장죽성리성(機張竹城里城)이라 새겨져 있다.

 

 

 

 

                  

 이동 중에'기장남산봉수대(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를 찾아간다.

이렇게 한바퀴 도는데 불과 한 시간 남짓.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봉수대는 중앙의 봉돈은 지름 2.4m, 둘레 9m의 돌로 쌓여 있으며,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

남쪽으로 해운대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 임랑 및 아이 봉수대에 연결되어 있다.

고려 성종 4년(985)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 현대적인 전화 통신체제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원형은 거의 허물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                   대강 그린 남산봉수대(봉대산 228.2m)의 산행개념도.

 

들머리 지점에 있는 안내판.(신천마을→우신 네오빌APT)

 

 

도로변의 이정표와 안내판.

 

 

임도급의 산책길이다.

 

 

      도중에서 만나는 이정표.

 

 

완만한 오름의 산길을 오르면...

 

 

이정표가 있는 작은 능선에 닿는다.

 

 

    능선에서 만나는 이정표.

 

 

   다른 각도에서 잡은 같은 이정표.

 

 

이 길은 해파랑길이였다.

 

 

남산봉수대에 닿았다.

 

 

안내판과...

 

 

이정표.

 

 

그리고 남산봉수대는 허허한 폐허로만 남아있을 뿐,나그네의 여심(旅心)마저도 허허로워짐은 어쩔 수 없었다.

 

 

5분 여만에 봉대산 직전의 갈림길에 도착한다.

이정표 좌측 10여 미터 지점에 '준 희님'의 봉대산 푯말이 있고 이정표 우측으론 우신네오빌아파트 가는길.

 

갈림길 이정표.

 

 

고산(孤山) 윤선도는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도 마을뒤에 있는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죽성사람들을 보살피곤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구전(口傳)된다.

 

 

'희 준님'의 푯말.

 

 

하산을 서두르며 다시 잡은 갈림길 이정표.

 

 

   해파랑길 리본.

 

 

작은 능선에서 이제 우측으로 각도를 꺾는다.

 

 

작은 능선상에 있는 고개의 이정표와...

 

 

다른 각도에서의 이정표.

 

 

이즈음의 천덕꾸러기 쇠오리 너댓마리가 유영을 하는 작은 소류지를 지나...

 

 

우신네오빌아파트 우측으로 내려온다.

 

 

입구에서 돌아본 모습.

 

 

원점으로 이동을 하며 좌에서 우로 한바퀴 돈 모습을 바라본다.

 

 

신천마을회관을 지나...

 

 

아까 올라갔던 기점으로 컴백이다.

 

 

기장군청.

 

 

도로변 버스정류소에 갈맷길 안내도와 도보인증대가 있다.

 

 

무엇인고 궁금하여 두껑을 살짝 열어보니 갈맷길 특정구간을 완주하면 인증을 받는 모양이다.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올라 베틀에 앉은 여인네를 만난다.     * 기장(機張)의 기(機)자는 베틀을 말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돌에 새겨진 것은 차성가(車城歌)의 전문이다. 

차성가는 기장의 각 고장과 주위경관을 두루 읊은 가사문학작품으로 창작연대는 1800년대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차성가의 제일 첫머리를 담았다.

차성(車城)은 고려 성종때 붙여진 기장의 옛이름이다.  * 당시 경주는 낙랑(樂浪), 진주는 진강(晋康), 울산은 학성(鶴城)이였다.
                                                   

 

기장은 부산 지하철 4호선이 새로 생겨서 접근이 훨씬 수월해졌다.                                   

부산 지하철 4호선 고촌역에 관한 상세정보 http://blog.naver.com/newboy3000/90173060321

--상  략--


나는 지금 멈추어 있다
잠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멈춤이 언제까지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겐 섬도 공항도 산장도 아닌
시간과 시간 속에 갇혀 있다
시간을 돌리려 몸부림 치는만큼
그 공간은 더욱 좁혀진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곳으로 떠나고있는
나그네가 되는 일이다

나는 겨울의 중간쯤 어딘가
낯선 손님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이름도 성도 없는 나그네로 태어난다
주름진 얼굴의 풍경 들을
꾹꾹 밟고 지나가면
얼마 지나지않은 시간들은
흔적 조차 하나 둘 지워낸다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모습도 아름답고 싶다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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