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모명재(募明齋)가 대구 수성구에서 '담티고개'를 넘어
경산으로 통하는 좌측 형제봉 기슭인 달구벌대로 525길 14-21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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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건물 전경 |
현재의 모명재 는 1912년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본 고택은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서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 작 기와집)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2개의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5개의 대청 기둥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어
보냈다는 한시가 걸려 있다.
앞뜰 우측 편에 큰 기념비가 있는데 이는 두사충의 묘소 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세운 '신도비'로 비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었다고 한다.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까지 접촉을 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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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있는 방 우측편 신도비 우측에 있는방 |
두사충의 호(號)는 모 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원병을 와
주위의 지형을 살펴 군 진지에 적합한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였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 항상 군진(軍陳)을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해왔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왔다가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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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기슭에 있는 두사충의 묘소 |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대구시 중구) 일대를 하사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중구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다시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 밑으로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拜禮)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많아지자 젊었을 때 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대구 근교 고산(孤山)으로 가다가 기력이 달려 담티재에서 되돌아오는 길에 우측에 있는 형제봉(현 2군사령부 뒷산)을 가리키며 저 산기슭에 '계좌 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사후 그의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 기슭에 묘를 쓰게 되었고 이 묘소에서
약 100m 떨어진 2시 방향에 모명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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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본체 모명재 우측에 있는 명정각 |
모명재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린 만동문(萬東門) 역시 '백천 유수 필지 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라 한다.
모명재 우측 50m 상에 있는 명정각(命旌閣)은 조선 순조 23년(1823년)에 태어나
고종 30년(1893년)에 세상을 떠난 두한필(杜漢弼)의 효행을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린 것이라 한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성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주하였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치마 팔각 기와집이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튓마루를 두었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역시 백천유수필지동 白川流水必之東 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어 보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는 대청기둥. 충무공 7대손인 삼남수군통재사 이인수 비문을 지은 신도비와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은 2점의 동물조각상이 있다. 뒷산 형재봉 기슭으로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이인수선생이 지은 신도비 명나라 청석 모명재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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