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경북을 걷다<16> 의성-대곡로에서 선비를 만나다. 세월의 더께에 희미해진 영남대로 흔적을 따라… | ||||||||||||||||
'찰나'(刹那)는 '영원'(永遠)이다.
불교에선 모든 것이 한 찰나마다 생멸을 거듭한다고 가르친다.
무언가 세상에 태어나고 사그라졌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 아니겠는가.
억겁의 세월도 찰나와 같음이다.
천년을 거슬러 옛길의 흔적을 찾으며 그것이 헛되고 헛됨을 다시 깨달았다.
오늘 디뎠던 '대곡로'(大谷路)에서 한점에 불과한 존재를 절감하며,
세월의 횡포 속에 사그라진 수많은 인간 군상의 희미한 흔적을
눈물겹게 되새긴다.
그나마 길을 거쳐간 선비 문인들의 글이 남아있음에 새삼 감동한다.
'대곡로'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한 줄기다. 팔조령을 넘어 다부재에서 한숨을 돌린 수많은 선비 문인들은 한양을 향해 청운의 꿈을 안고 의성 땅 비안과 다인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넌 뒤 예천과 문경 땅으로 갔다. 오늘 찾는 의성군 다인면은 역사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때 예천에 속했다가 상주에 속하기도 했다. 지금은 의성에 속해 있지만 옛 역사 기록은 오히려 예천에 많이 남아있다. '예천군읍지'에 따르면, 대곡로는 '예천군에서 남으로 70리이며, 비안현 경계까지'라고 기록돼 있다. 흔적조차 희미한 그 길을 찾아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 김부일씨는 어린 시절을 다인에서 보냈다. 출향한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고향 땅에 대한 애정은 커져만 갔고, 급기야 다인에 얽힌 기록과 문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인문향'(多仁文香) 출간을 준비 중인 그는 대곡로를 거쳐간 선비들의 글을 찾기 위해 수십년간 고문서 3천여권을 모았고, 내로라하는 문인 80여명이 다인 땅을 지나며 글을 남겼음을 밝혀냈다. 바로 그 글들을 모으고 번역해서 '다인문향'을 펴낼 계획이다.
'동행-경북을 걷다' 시리즈에서 소개했던 여느 길과 달리 이번 대곡로는 그 모습을 많이 잃었다. 길을 찾았을 때에도 도로 확장을 알리는 붉은 깃발이 곳곳에 나부끼고 있었고, 거대한 제방을 만드는 공사도 한창이었다. 중앙고속도로 의성나들목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비안과 안계를 거쳐 다인에 닿을 수 있다. 다인면 소재지 가기에 앞서 오른편 '삼분리' 쪽으로 길을 잡으면 된다. 삼분리를 지나 고개를 올라서면 '비릿재'를 새겨놓은 큰 돌이 막아선다.
비릿재는 서기 550년쯤 역사 속에 등장한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 땅이던 한강 유역을 빼앗은 뒤 국경 순례를 하던 중 이곳에 들렀는데, 거대한 차돌을 몸소 들어보였다고 한다. 이후 길을 지나던 장수나 선비 중에 이 돌을 들지 못하면 재를 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도적떼에게 화를 입을 때 흘린 피가 큰 바위에 스며들어 피비린내를 풍긴다 하여 '비릿재'로 전해진단다. 지금 그 돌은 삼분리 교회 앞에 있는데, 10여년 전 의성군에서 돌 무게를 재 봤더니 무려 142㎏. 이 돌을 들었다는 진흥왕은 엄청난 장사였음에 틀림없으리라.
이곳에 올라서면 다인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넘어서면 달제 마을이 나온다. 원래 달동과 김제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쉬어가면 통달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다 해서 달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일제가 마음대로 마을 이름 앞뒷 글자를 조합해 달제라고 지어버렸다고 한다. 영남 선비들은 도리원역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비릿재를 넘어서면 이곳에 당도했다. 고개를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에 마을 앞 왕버들 나무에서 쉬었는데, 수령 260년이 된 그 나무는 지금도 꿋꿋하게 우뚝 서서 옛길을 지키고 남아있다. 저 멀리 낙동강과 만나는 지류의 제방 쌓기가 한창이다. 새로 난 아스팔트길을 만나기 직전에 오른편 산길이 소담하게 남아있다. 그나마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대곡로' 구간이다. 몇백m도 채 못 가서 밭이 막아서고 논두렁으로 바뀐다. 길이 막히니 어쩔 수 없다. 다시 신작로를 따라갈 수밖에. 오른편에 옛날 달제초등학교 자리가 남아있다. 김부일씨는 "어린 시절엔 학교 건물이 초가집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며 "조금만 더 가면 낙동강을 건너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했다. 나루터길은 선비 문인과 함께 장사꾼들로 북적였다. 이 때문에 지금 초등학교 자리 옆으로 선술집들이 한때 불야성을 이뤘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지만.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낙동강이 출렁인다. 한때 나루터가 있던 자리는 모래를 파낸 흔적과 홍수 때 밀려든 쓰레기로 혼잡스럽다. 강바닥을 내려서면 저 멀리 오른편에 빼곡히 솔숲이 우거진 '다인수'(多仁藪)가 보인다. '수'(藪)는 '늪, 수풀'을 뜻한다. 김부일씨는 "다인수는 예천군읍지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으로, 낙동강이 비봉산에 부딪혀 굽이치며 소(沼)를 이루었고 상류 토사가 쌓여 자연스레 초목이 빽빽히 우거진 습지를 형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인수 옆에서 밭을 일구던 한 촌로는 이가 다 빠져 시원찮은 발음으로 한탄스레 한 마디 건넸다. "낙동강 사업 한답시고 이 밭이며 숲을 다 없앤다네. 비록 허락도 안 받고 가꾸는 하천 밭이지만 생계를 꾸려가는 유일한 수단인데, 이 땅을 빼앗기면 이젠 무얼 먹고 산답니까?" 그저 세월만이 길을 바꾸고 풍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강길을 되짚어 나와 앞서 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대곡사'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절 입구에는 비록 색이 바래고 낡기는 했어도 날렵하고 웅장한 맛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건축물이 눈에 띈다. 바로 '대곡사 범종각'이다. 고려 공민왕 시절 지어진 뒤 소실과 중창을 거듭한 옛 건물이다. 모름지기 절집의 고졸한 맛은 흐르는 세월을 거스르지 않음에 있다. 대곡사 명부전과 대웅전도 마찬가지다. 공민왕 때 지공과 나옹 두 선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특히 대웅전 앞 다층석탑은 전국에 몇 기 남지 않은 고려 초기 청석탑(靑石塔)의 양식을 고스런히 간직하고 있다. 흔히 보는 화강암 탑이 아닌 것도 재밌거니와 차분히 내려앉은 청석의 쌓음이 억겁의 세월을 의미하는 듯하여 새삼 눈길을 더 주게 된다. 대곡사가 자리한 이 산이 바로 그 유명한 비봉산(579.3m)이다. 고려 이전엔 태행산, 조선시대엔 자미산으로 불렸으며, 대곡사에서 적조암을 거쳐 3㎞에 이르는 등산로도 있고, 정상에는 후백제 견훤이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거기부터 기나긴 계곡이 100리나 펼쳐진다.
비봉산은 한때 인근 동리에서 수만명이 모여들었던 '화전놀이'로 유명했던 곳이다. 삼월 삼짇날 봄꽃이 만발할 때면 제각기 멋을 낸 아낙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화전노래를 부르고 진달래 꽃잎을 따서 '두견화전'을 지져먹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엔 행여 이곳에 모인 조선사람들이 봉기라도 할까 싶어 인근 경찰서 순사들이 총동원되기도 했다.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는 '십칠일에 대곡사에 들어가다'(十七日 入大谷寺)라는 시를 남겼다. 그 시의 한 구절로 '대곡로' 끝맺음을 갈음한다. '가벼운 바람은 조용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 지는 달은 새벽 빛과 함께 밝구나.'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향토사 연구가 김부일 010-3817-3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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