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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 북구 함지산

최두호 2017. 11. 20. 17:50

 

 

대구 칠곡 최고봉 함지산의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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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지산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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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지도

* 간단한 함지산 등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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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 등산로)칠곡 함지산…가족산행 안성맞춤·울창한 숲 만끽
▲ 함지산 등산의 출발지 운암수변공원. 운암지에서 오르는 함지산 등산로는 경사가 거의 없어 나이드신 분들도 많이 찾는다.
함지산은 북구 주민들이 가장 즐겨찾는 동네 뒷산이다.
주말이면 1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특히 칠곡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함지산은 산의 모양새가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함지산 혹은 방티산으로 불린다. 해발 287.8m로 높지않은 함지산은

북동쪽으로는 팔공산과 연결되고 남서쪽으로는 금호강과 면하고 있어

정상에 오르면 대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 정상에는

 팔거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성을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등산로는 칠곡3지구 아파트가 있는 운암지공원 쪽이 가장 붐빈다.

운암지공원은 칠곡택지개발로 옛 기능을 잃어버린 저수지를

자연친화 수변공원으로 개발한 곳이다.

 

운암지공원에서 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경사가 거의 없다.

그래선가 곳곳의 휴식의자는 노인들의 차지다.

삼삼오오 모여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곳곳에 체육시설이 있는 걸로 봐서 함지산은 가벼운

운동을 위해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휴일에는 훌라후프와 각종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주민들이 줄을 서기까지 한다. 등산로를 가로지르던

다람쥐 한 마리가 사람을 피하지도 않는다. 천천히

제 갈길을 가는 게 낯설다. 다람쥐 개체수도 상당히 많다.

 

 

900m 남짓한 체육시설지까지 오르는 데 25분 정도 걸린다.

체육시설지 쉼터에는 철 지난 잡지와 책까지 비치돼 있다.

쉬면서 독서하기에는 그만이다.

 

정상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등산로 외에도 샛길이 많이 나 있다.

샛길로 사람이 많이 다닌 탓에 훼손된 숲이 적지 않다.

 

함지산은 지정된 등산로로만 다니는 등산문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하산은 함지산 정상에서 공동묘역을 거쳐 구암어린이집으로 내

려가는 것도 좋다. 약간 가파르다.

 

옻골동산에서 체육시설지(1.4km)를 거쳐 정상으로 가기도 한다.

정상퍼걸러-약수터(1.9km)나 망일봉-대각사(0.7km)쪽으로 가는 코스도 있다.

▷운암지공원-(0.9km)-체육시설지-(0.5km)-정상파고라-(0.9km)-정상.

(운암지-정상 총 2.3km, 왕복 1시간 30분 소요)

 

북구지역 전설 모음

 

1.말샘의 전설

 

서변동 아랫마을 뒷산 중턱에 능성구씨의 큰 재실이 있고 그 맞은 편에 '말샘'이라 불리우는 조그마한 샘이 하나 있다.

그에 얽혀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조 중기,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십년 전 이속 뒤산 저편 함지산에서

그 산의 정기를 어어받은 한 장군이 내려왔는데

그 장군이 지금의 말샘에 이르자 준마가 솟아나와 그 장군을 태우고 무태 앞들을 달렸다.

그 때 장군이 갖고 있던 말채찍을 분질러 한 가지는 무태 앞 들에 꽂고

 나머지는 무태에서 제일 높은 산봉인 가남봉 정상에 다 꽂았다고 전하는데

무태 앞 들에 꽂은 가지는 주민들이 당나무라 하여 지금도 있고

가남종 정상에 꽂은 나무는 크게 자'마치나무(말채나무에서 유래)'라 하였으며

 주민들은 모두 영험하게 생각하고 신성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이 산에 산불이 크게 나서 나무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밑둥치만 남았는데,

그것마져도 약에 쓰인다고 캐어가 버려 지금은 구덩이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라고 하며

그 때 말을 내달려 무태 앞 들을 지나 가남봉으로 올라가 말 채찍을 정상에 꽂고는

 단숨에 팔공산 쪽으로 향해 뛰었는데 그 때 남은 말발굽 자리가 지금의 연경동 뒷산에 있는 말발굽바위라 한다.

말샘은 지금은 물줄기가 말랐는지 맑은 물이 솟아오르지는 않으나 물은 계속 그대로 괴어 남아 있다.

 

2.효자각의 전설

 

북구 산격동에는 서 효자 효자각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조선 숙종 임금 때)서명보라는 분이 살았다.

그 분이 7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주가 할 일을 거뜬하게 해 내었다.

얼마 뒤 홀로 되신 아버지 마저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 분은 아버지의 대소변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받아 내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은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히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약값으로 썼다.

그 분의 아내도 밤을 새워가며 길쌈을 하고 삭바느질도 해서 시아버지의 약값에 보탰다.

이렇게 아버지의 병간호를 24년 동안이나 하였다.

아버지의 병에 산비둘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그물을 쳐 놓았더니 산비둘기가 방안으로 날아들었고,

꿩이 좋다고 하여 꿩을 잡으러 산에 갈려고 했는데 부엌 뒷분으로 장끼가 날아들었다.

이것은 하늘이 도와준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우리 고장 사람들은 모구 그 분을 도왔고 나라에서는 고기와 쌀을 내렸다.

그 분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동안 일기를 꼬박 꼬박 적었다.

그 분이 돌아 가신 뒤 시탕록이라는 두 권의 일기장이

우리 고장을 살피던 암행어사에게 발견되어 나라에 표창을 추천하였다.

나라에서는 그 분이 돌아가신 뒤 지금의 상공부 장관인 공조좌랑이라는 벼슬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는 정문을 내리고 효자각을 지었다.

 

3.탈안바위의 전설

 

북구 매천동에 가면'탈안바위'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탈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인들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온갖 노략질을 일삼으려 자꾸 북상하여

마침내 대구 근교의 팔달교가 있는 금호강 강변에 왜인들이 진을 치고 칠곡쪽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 경상감사는 이 탈안바위 부근에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경상감사는 막강한 병력을 상대하여 싸우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는 격이라 생각하여

 이곳의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했다.

그리하여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병사와 군마를 탈안바위에 모이게 하여서

병사들로 하여금 말 안장을 벗어서 그것을 모두 바위위에 놓아두고 휴식을 취하는 시늉을 하게 했다.

왜인들은 금호강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진영을 환히 바라볼수 있었다.

조선군들이 태평스럽게 말 안장을 벗어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유를 보아서

필시 대규모 병력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왜장은 왜군을 철수시켰다고 한다.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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