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李氏(月城李氏)
1. 시조 : 이 알평(李 謁平)
시조: 휘 알평,호:표암, 자: 천서(始祖 諱 謁平 號 瓢巖 字 天瑞)
표암재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회가 소유하고 있다. ‘박바위’, ‘밝은 바위[光明巖]’라는 뜻을 가진 바위로, 탈해왕릉(脫解王陵) 서북쪽의 박바우산에 있다. 경주이씨 시조이자, 신라 6촌(六村)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일본 사람인 호공(瓠公)이 처음 동해에서 건너올 때 허리에 찬 표주박[瓠]을 이곳에 풀었는데, 그뒤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나라 건립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BC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다고도 전해진다.
경주이씨의 근원지이며, 신라건국의 산실이자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가 시작된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새기기 위해 1806년(순조 6)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이어 1925년 표암재(瓢巖齋)가 건립되고,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등이 건립되었다. 해마다 3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한다.
慶州李氏(月城李氏) 시조 은열왕 알평공
慶州市 동천동에는 慶州李氏 시조 알평공의 위패를 모신 시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종문들의 뜻을 모아 始祖하강지 아래에 악강묘, 표암재와 시조 경모비를 세우니 표암이란 이름은 시조하강신화에서 유래되었다.
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慶州 하늘에 한 줄기 서운이 감돌더니 빛을 타고 신인 한 분이 홀연히 人間世上으로 내려오셨다. 용모가 비범하고 덕과 위엄이 가득했다는 그 선인이 바로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 이시다. 경주 표암봉, 이른바 밝 바위에 하강하시니 광임대는 시조께서 첫발을 디디셨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시 경주를 다스리던 진한은 여섯 部落의 연맹체로서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백성은 우매하였다. 이에 알평공께서 알천양산村長으로 추대되시어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셨다. 특히 국사를 결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안건으로 채택치 않는 만장일치 제도를 확립하셨는데 이는 후일의 신라 화백제도로 계승되어 三國統一의 原動力이 되었다.
다른 村長들과 百姓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나 始祖께서는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0여 년간 섭정함으로써 신라건국의 기반 마련에 온 힘을 쏟으셨다.
건국 후에는 아찬의 벼슬에 올라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國防을 안정시키셨다. 3대 유리왕은 건국원훈인 알평공에게 이씨성을 사성하니 이로써 이천년 慶州李씨의 도도한 歷史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알평(謁平) 은열왕(恩烈王) 이(李)씨의 조상이 되는 알평(謁平)은 진한의 여섯 마을의 한 우두머리로 하늘에서 표암봉(瓢岩峰)이라는 산정에 내려온 신인이었다. 알평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박(瓢)을 차고 왔는데, 박을 표암봉 바위 아래 두었더니, 넝굴이 자라서 바위를 덮게 되었다.
그래서 바위의 이름을 '박 바위'라고 부른다. 또 다른 전설에는 이 마을에 살던 늙은 할머니가 마을의 큰 바위 아래에 박을 심었는데, 그것이 자라서 바위를 덮었다고 한다. 커다란 박 하나가 열렸는데, 보통 박과는 달리 차돌같이 단단했다. 어느 날 그 박 속에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알평이다.
나. 경주이씨 시조휘 알평 경모비(慶州李氏 始祖諱 謁平 景募碑)
所在(소재) :慶州市(경주시) 東川洞(동천동) 산16번지
지 은 이 : 鷺山(노산) 李殷相(이은상) 先生(선생)
題字(제자) : 秉喆(병철)께서 쓰시고 鄭夏建(정하건) 先生 (선생)께서 새기셨다.
誠金(성금) : 慶州李氏中央花樹會(경주이씨중앙화수 회)總裁(총재) 秉喆(병철)의 誠金(성금) |
경주이씨 시조 경모가(慶州李氏 始祖 景慕歌) | |
이은상 작사 신윤원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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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산 금오산 선도산이 에워 둘렀고 문천이 알천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서울 양산촌장 내리신 자취 이천년 묵은 역사 흐린 듯 또렷하도다. 옛조상 축복받아 자손과 겨레영광 영광있으리 |
신라의 2천년 역사는 꿈같이 지나갔건만 월성 옛터에는 돌 한덩이 풀 한 포기마다 조상의 숨결이 배여 있고 축복 받은 자손들이 대대로 그 전통 그 문화 이어내려 오늘을 누리는 것 생각해보면 어찌 느껍지 아니하냐.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를 비롯하여 동경지 와 가승등 옛 문헌을 상고하건데
신라는 본시 진한의 땅으로서 거기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은 알천 양산촌이며 그 마을의 어른은 알평이신데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 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한선제지절 첫해 임자 기원전69년 3월초 일일 알평을 비롯한 여섯 마을의 어른들은 자제들과 더불어 알천언덕 위에 자리를 같이 하고 앉아 여섯 마을 전체를 다스릴 거룩한 이를 받들어 모실 것을 의논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라정가에 상서론 빛이 땅에 드리우고 거기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상을 짓고 있으므로 달려가 보았더니 자주 빛나는 큰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용모 단정한 동자가 나와 뒷날 13세 되던 한선제오봉 첫해 갑자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 왕이라.
알평 어른 이야말로 신라 건국의 첫장을 꾸미신 원훈이거니와 다만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알에서 나오셨다는 것들은 우리 옛 조상들의 신성함을 말한 귀중한 기록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제3대 유리왕9년 서기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릴 적에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이씨로써 성을 삼아 비로소 경주를 본관으로 한 큰 집안이 열리게 되었구
무릇 2천여 년을 거쳐 오는 동안에 차성, 우계, 합천, 가평, 평창, 아산, 재령, 원주, 장수, 진주, 영천, 흥향, 울산, 등 많은 지종으로 나뉘어 가지와 줄기마다 꽃 피고 열매 맺듯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문무장상들이 헬 수 없이 배출되었음을 보거니 이 어찌 깊은 뿌리에서 솟아오르는 진액의 덕택이 아니며, 또한 이 어찌 시조의 끼치신 은혜가 아닐까 보냐,
그의 혈통을 받은 자손들이 거룩한 유적지를 그냥 보지 못하여 순조때 표암 위에 시조의 자취임을 새겼고, 순종 때에는 바위 아래 표암제를 세웠으며, 또 근래에 국가에서 거룩한 유적임을 찬양하여 묘우를 세웠고, 터전을 확장하며 장원과 송죽으로 경내를 미화하여 조상을 사모하는 자손들의 마음은 기쁘기 여지없다.
그러나 공의 사적은 결코 한씨 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므로 나는 굳이 그 유적을 찾아 알천 동북쪽 금강산 내린 맥이 마지막 맺힌 표암 위에 올라 눈을 감고 2천년전 민족의 옛 조상을 사모하며, 다시 그 혈통의 큰 인물들이 대대로 겨레 위해 큰 업적 끼친 것들을 헤아려 볼 때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명활산 금오산 선비 산이 에워 둘렸고, 문천이 알천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알평어른 내리신 자취 2천년 묵은 역사 흐리듯 또렷도 하다 옛 조상 축복을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있으리!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慶州 하늘에 한 줄기 서운이 감돌더니 빛을 타고 신인 한 분이 홀연히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용모가 비범하고 덕과 위엄이 가득했다는 그 선인이 바로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 이시다.
慶州 표암봉, 이른바 박 바위에 하강하시니 광임대는 시조께서 첫발을 디디셨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시 慶州를 다스리던 진한은 여섯 부락의 연맹체로서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百姓은 우매하였다. 이에 알평공께서 알천양산촌장으로 추대되시어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셨다. 특히 국사를 결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안건으로 채택치 않는 만장일치 제도를 확립하셨는데 이는 후일의 신라 화백제도로 계승되어 三國統一의 原動力이 되었다.
다른 村長들과 百姓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나 始祖께서는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0여 년간 섭정함으로써 新羅建國의 기반 마련에 온 힘을 쏟으셨다.
建國後에는 아찬의 벼슬에 올라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국방을 안정시키셨다. 3대 유리왕은 건국원훈인 알평공에게 이씨 성을 사성 하니 이로써 이천년 경주 이씨의 도도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평공 이후의 기록이 실전 되어 천여 년의 세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알평공을 시조로 소판공 거명을 중 시조로 선대의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신라소판경주이공사단비명(번역문)
이땅에민생이있으면하늘이신성한임금을반드시낳으시며현철충량한보필도반드시있게되어국가를
세우고정치를이루나니이는천하만세의통한의리인것이다저옛날진한유민들이육부촌을만들고각각
촌장을두어다스리다가박혁거세의신성함을보고임금으로세웠으니겸양하는풍토를볼수있도다이때
양산촌장휘謁平께서선두에서주장하였으니바로우리경주이씨의시조이시다경주표암에서태어나신
성문무겸전하여나라를세우고임금을도와민생을보살피었으니지극한덕망은하늘과사랑의도움을얻
어높은벼슬과긴수명을모두누리게된것이다유리왕구년에이씨의성을받았고대대로진골이되었으니
아성대하도다그러나초창시대로문헌이남아있지않아계보를찾지못하고신라끝에이르러휘居明에서
부터족보계대를세우게되었으니이어른이우리이씨의중간시조가된것이다족보에이르기를벼슬이소
판에이르렀다하였으니소판은신라때높은벼슬인즉공의덕업과행실이풍부하였을것인데자취를찾을
수없고배위생줄묘소가모두실전되었으니연대가멀어자연그렇게된것이다아들金現은병부령이고승
자金書는고려개국을도와삼한공신이되었고증손潤弘은병정이고현손承訓은시랑承謙은판이부사이
다십사대손에이르러휘翮은호悅軒이며문하평리이고휘강은판전객시사이다십오대손에휘仁挺은호
誠菴이며문하평리이고瑱은호東菴이니임해군으로시호文定이고世基는호松巖이니대제학으로서시
호文僖이고신유는예의판서이다십육대손에榑는양시장원으로사인이고樛도양시장원으로헌납이고
琯은호怡菴이며양시장원으로가락군이고薺賢은호益齋이며양시장원으로일곱임금에걸쳐정승을네
번이나역임하였고시호文忠이다蒨은호菊堂이며양시장원으로대제학이고시호文孝이다邁는부정이
고薖는상서이며蓨는사인이고元茂는보승낭장이다십칠대손에元善은전서依班은군기감壽得은밀직
은상서이고天柱가있고瑞種은부령達尊은호雲窩문과직제학이고彰路는밀직사敬中은월성군으로시
호文貞이고培中은문과판서이고達衷은호霽亭계림부원군으로시호文靖이고誠中은대제학으로시호
靖順이다敬之는대제학으로오성군이고敬元은수찬元普는지인주사淑魯는가선處中이있고元敬은첨
정이다십팔대손에養吾는직장存吾는호石灘문과정언으로辛旽을논박고려충신으로유명하고存中은
진사存斯는문과교감이다그외에도申佑시랑이있고후손에之秀는월성군이다공의후손이천년이넘는
동안에그수를헤아릴수없이많으며분적종도합천우계아산재령원주진주등의성씨가전국에펴져있으
며도학문장과현상양파와문재덕으로세상의추앙을받는이도가기록할수없으므로공의현손까지만기
재하고이하는고려이상에특별한이만기록하였다아하늘이이처럼보답함은반드시그까닭이있는것이
다그러나후손이공을추모하는사업이없었으니어찌통한이아니리오지난해평리공파에서추모사업을
발논하여所要대지를안성군원곡에확보하고중앙화수회에상의온종문의찬동을얻고그종회장埈鎬와
各派代表가찾아와글을청하였다그윽히생각건대옛사람이묘를잃으면부득이설단하였으니이제분묘
와제단의차이와거리의멀고가까움은논할것이없도다자손의기운이바로선조가남긴기운이므로지성
으로제사하면선조가감응함을어찌믿지않으리오우리일가들은서로정성을다해위로는선조의영령을
위로하고아래로는후손의사모하는마음을펴서천년동안못했던일을이루면선조의영혼이반드시나도
후손이있었구나하면서무궁한복록이내리도록하시리라 銘에이르되
신라보다먼저육부촌장있었으니표암공신명하여백성들모여들었네박씨임금옹립하니공로지대진골
되었구나신라말에소판공일어나중시조되었는데자손들온나라에가득하나유적은없어졌네이를개탄
제단모시니정리에맞는구나큰비석원곡에세워이글을천추에보이련다
檀紀四千三百二十七年 得姓一千九百六十三年甲戊 四月二十三日에 세우다
尙書公派 白沙文忠公十二世孫 國會議員 鍾贊 國譯
蘇判公祀壇建立推進委員長 評理公派 埈鎬 謹竪
菊堂公派 相千 謹刻
가. 시조와 진한(辰韓) 6촌
경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있다. 신라 6촌(村)은 알천양산촌 (閼川楊山村)·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등인데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밑돌부(及梁部)(李氏)/고허부(高墟部)→새돌부(沙梁部)(崔氏)/대수부(大樹部)→점돌부(漸梁部)(孫氏)/우진부(于珍部)→본피부(本彼部)(鄭氏)/가리부(加利部)→한기부(漢祇部)(裵氏)/명활부(明活部)→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있는데,『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광임대(光臨臺)
[始祖의 初降址를 保護하기 爲하여 1985년 國家에서 세우다]
밝바위
[始祖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곳으로 傳해 내려온다]
유허비(遺墟碑)
[조선조 순조6년(1806년)에 건립된 비이다. 謁平 始祖께서 신라의 전신(前身)인 사로국(斯盧國)을 건국하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사적비]
*.옛날 경주이씨 묘역 비문에 월성이씨로 되어 있는 이유는
경주에. 월성은 신라의. 역대. 왕께서. 거주하셨던 도성으로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합니다. 때문에 월성을 중요시 하였고.예전 족보 표면에는 경주월성 이씨라고 적혀 있습니다. 왕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경주보다. 월성을 앞세워. 월성이씨라고.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 조상님께서는 월성이씨라고 많이 하였으며. 비문에도 월성이공 이라고 기록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월성이라는 옛 성터는 있으나 월성군도 없어 젔고 호적에도 경주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주이씨 가훈
慶州李氏家訓
경 주 이 씨 가 훈
獨學而陋 聞道宣晩 何不自反 何德于民 四爲國相 幸而致之
독학이루 문도선만 하불자반 하덕우민 사위국상 행이치지
祇遠衆謗 不揚之貌 又何寫爲 告爾後嗣 一覩三思 誡其不幸
기원중방 불양지모 우하사위 고이후사 일도삼사 계기불행
早夜以勉 毋苟其幸 庶幾知免 重而堅得之天 滌以新在人乎
조야이면 무구기행 서기지면 중이견득지천 척이신재인호
毋不敬 毋自欺 馭朽索 樊枯枝 進知退 安思危 려無咎 念在慈
무불경 무자기 어후색 번고지 진지퇴 안사위 려무구 염재자
*려=엄할려 於益齋先生眞自贊
어익재선생진자찬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고, 도를 들은 것은 자연히 늦었다. 불행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것, 어찌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백성에게 덕 보인것, 무엇이기에 네 번이나 대신이 되었단 말이냐.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기에 다만 모든 비난을 불러들였다. 못난 내 얼굴 그려 두면 무엇 하나, 너의 후손에 알리기 위함이다. 한번 쳐다보고 세 번씩 생각하여 그런 불행을 저지를까 경계하여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노력하여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행여나 불행을 면하게 되리, 무겁고 단단한 것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요, 씻어서 새롭게 하기는 사람에게 매였다.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어야 하고, 스스로를 속임이 없어야 한다. 썩은 새끼로 말을 다루듯 조심하고 마른나무 가지에 매달리듯 조심하라. 나아갈 때에 물러설 줄을 알아야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불편한 일이 있어도 재앙 되지는 않는 것이니, 생각이 늘 이에 있으라. -익재선생 진자찬에서-
지은이: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공민왕16년졸)
자는 중사(仲思) 호는익재(益齋) 실재(實齋) 력옹(력翁)
*력=도토리나무 력.
공민왕 묘정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는 익재난고, 익재집, 역옹패
설, 효행록, 서정록, 사략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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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忠公家訓
문 충 공 가 훈
白沙李文忠公恒福曰 聖人制禮 年過七歲 男女不同席 嫂叔不
백사이문충공항복왈 성인제례 년과칠세 남녀부동석 수숙불
通問 其別嫌愼微之意 至密且詳 不如是 無以防後世人嫌 而
통문 기별혐신미지의 지밀차상 불여시 무이방후세인혐 이
有起淫佚之端 後世之人 不知此意 親戚接遇有別 則曰 短於
유기음일지단 후세지인 부지차의 친척접우유별 즉왈 단어
睦族 指無倫無法之家 曰 親戚相愛 至於接膝而坐 同床而食
목족 지무륜무법지가 왈 친척상애 지어접슬이좌 동상이식
謔浪笑傲침침淪 入於禽獸之域 而自不能覺 或謗興於情外 變
학랑소오침침륜 입어금수지역 이자불능각 혹방흥어정외 변
生於惟簿 凶身滅族而後悔 可不戒哉
생어유부 흉신멸족이후회 가불계재
백사 이문충공 항복이 집안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날 성인이 예절을 마련할 때 사람의 나이가 일곱살을 넘어면 남자와 여자가 같은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형수와 시숙은서로 통하여 방문하지 않는다. 고 하였는데, 그것은 남녀 간에 있어서 꺼리고 삼가 하는 뜻이 지극히 세말하고 또한 자세한 것으로, 이와 같이하지 않으면 후세에 꺼리는 일을 막을 수가 없어 음탕한 마음의 근원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친척이서로 접대하는데 분별이 있으면 일가친척을 화목하게 하는데 모자란다. 라고 말하며 인정이 없는 것으로 지목하고, 법도가 없는 집안에서는 친척이 서로 사랑한다. 라고 말하면서 남녀가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고 한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익살스럽고 방탕한 말을 하고 우습고 오만한 짓을 터놓고 해서, 금수와 같은 지경으로 빠져 들어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혹은 비방하는 말이 감정 밖에서 일어나고 변고가 집안에서 생겨, 몸을 망치고 일가친척을 망하게 만드는데 이른 뒤에야 뉘우친다. 이를 가히 경계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지은이 : 이항복(李恒福).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 이다.
임진왜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우의정으로 지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에 전임되어 도원수로 도체찰사 등을 겸직, 이어 영의정에 승지하여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1604년 호성일등공신에 봉해 졌다.1617년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반대 하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별세했다. 별세한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포천의 화산서원, 북청의 노덕서원에 제향 되었다.
경주이씨는 신라건국의 모체인 사로의 육부중 알천양산 촌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 벼슬을 지낸 진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이씨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에서 부터 훌륭한 인맥을 형성하여 벌족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명현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혔다.
'처가 장모님 卒壽.盛又가족 모임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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