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선비들은 왜 험준한 육십령 고개를 넘어 화림동 계곡을 찾았을까?
영남의 정자문화 일번지로 불리는 함양 화림동 계곡으로 가려면 육십령을 넘어야 한다.
남덕유산 아랫자락을 타고 넘는 육십령(734m)은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 위치한 백두대간 고개.
옛날 산적이 들끓어 육십명이 모여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해 육십령이라고도 하고,
고갯길이 육십구비라 육십령이라고도 하는 험한 고개였다.
지금은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육십령터널을 순식간에 통과하지만
조선시대 선비처럼 유람하는 운치를 맛보려면 육십령을 넘어야 한다.
백두대간을 타고 남하한 단풍은 시나브로 육십령을 넘어 금천 상류인 화림동 계곡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은 백두대간 아래 첫 마을인 경남 함양의 서상면과 서하면 60리를 흐르며
계곡에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소를 빚어놓았다.
너무 투명해 초록빛을 띠는 계류는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화강암 반석을 미끄러지듯 흐르다
곳곳에 선녀탕 같은 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앉아 자연을 벗한다.
그 계곡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화림동(花林洞)이다.
본래 화림동 계곡은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고 해서 여덟 개의 소와 여덟 개의 정자로 유명했다.
그러나 네 개는 사라지고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전해왔으나 안타깝게도 2003년 방화로 농월정마저 소실됐다.
화림동 계곡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정자는 거연정(居然亭).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정 중 으뜸으로 꼽히는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소요하던 곳으로
후손 전재학 등이 1872년에 세웠다.
화림동 계곡의 여느 정자와 달리 거연정은 화림교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다.
팽나무 물푸레나무 등 수령 300년이 넘는 고목의 단풍잎 사이로 보이는 거연정은 한 폭의 그림.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천의 커다란 자연석 위에 주춧돌을 세우고
네 모서리를 떠받치는 활주로 극적인 균형미와 조형미를 조화시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소에는 단풍잎이 둥둥 떠다니며 시심을 자극한다.
군자정(君子亭)은 화림동 계곡의 여느 정자와 달리 계곡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영귀대라는 너럭바위에 세워진 군자정은 자연을 정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연의 일부로 승화시킨 것이 특징.
조선의 5현으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이곳을 찾아 시를 읊자
군자가 유람한 곳이라 하여 전세걸이라는 선비가 세웠다.
화림동 계곡의 다른 정자와 달리 동호정(東湖亭)은 단풍처럼 고운 단청이 채색되어 있다.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유영하던 곳으로 후손이 1890년에 건립했다.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자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 리를 달렸던 인물.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노송에 둘러싸인 동호정은 정자 건축문화의 대범성을 보여준다.
대들보는 마름질을 하지 않은 통나무로 뒤틀려진 나무 모양을 그대로 살렸다.
누대에 오르는 계단은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도끼로 툭툭 찍어 만들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울퉁불퉁한 계단이 균형을 이루고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투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동호정 앞에 섬처럼 생긴 너럭바위는 해를 가릴 정도로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遮日岩).
길이 60m에 넓이가 40m쯤 되는 차일암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원지로 이름 높았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셋째 아들인 삼연 김창흡은
차일암을 보고 ‘넓은 반석에는 천 명이나 앉을 수 있고 큰 바위엔 악기를 백 개나 매달 수 있네’라고 읊었다.
한양의 선비들이 기생을 대동하고 차일암을 비롯한 화림동 계곡의 너럭바위에서 탁족도 즐기고 유희도 즐겼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화림동 계곡의 마지막 정자였던 농월정(弄月亭)은 월연암(月淵岩)이라는 드넓은 너럭바위에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월연암 곳곳에는 바위가 움푹 들어간 웅덩이가 있다.
이층누각이었던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가 1637년에 처음 세웠다.
농월정이 있던 오른쪽 너럭바위에는 웅혼하고 유려한 글씨체로 ‘지족당이 지팡이 짚고 신을 끌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之所)라는 글씨가 깊게 새겨져 있다.
장구란 지팡이와 신을 뜻하는 말로 산책을 의미한다.
화림동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과 교감하는 이곳에 남명 조식 선생이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푸른 봉우리 우뚝 솟고 물은 쪽빛인데/
숨은 명승 많이 취해도 탐욕은 아니리/
이 잡으며 어찌 굳이 세상사를 말하리/
산수를 이야기해도 할 말이 많을 텐데”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살던 남명 조식 선생은 51세 되던 해 여름에 제자들과 함께
화림동 계곡의 월연암을 찾아 시 한 수를 남겼다.
이나 잡고 사는 옹색한 처지이나 산천초목을 벗삼아 명리를 버리고 은거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요즘 사람이라고 옛 선비의 음풍농월을 모를 리 없다.
비록 농월정은 화마에 사라졌지만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농월정 주변의 풍치를 가슴에 새기고픈 관광객들로 계곡은 쓸쓸하지 않다.
조선의 선비들은 왜 화림동 계곡을 좋아했을까?
화림동은 다른 계곡과 달리 물은 풍부하지만 대부분 너럭바위를 타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시끄럽지 않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소리와 부드러운 물소리가 어울려 시심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함양의 선비들이 굳이 화림동 계곡에 정자를 짓고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선비들이 육십령을 넘어 화림동 계곡을 찾은 까닭이리라.
농월정 국민 관광지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 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
가히 우리나라의 정자문화의 메카라고 불리어지는 곳답게 계곡 전체의 넓은 암반 위에
수많은 정자들과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곳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누정으로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리는 화림동 계곡의 정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었다고 합니다.
농월정이라는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처럼 밤이면 달빛이 물아래로 흐른다고 합니다.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라고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이나 됩니다.
정자는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둔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으로 팔작지붕이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습니다.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다 계자난간(걸터앉거나 기대어 주위 공간을 조망하기 위한 것)을 둘렀습니다.
농월정의 관광 편의시설은 19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2,000여 평의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되어 있어 배수가 잘 되어 비오는 날에도 야영이 가능합니다.
이곳 화림동은 더덕구이, 백숙, 메기 매운탕이 별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월정은 지난 2004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함양군에서 총 3억원 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복원하였습니다.
함양 화림동계곡 동호정
바람에 마음 씻어볼까.. 자연 속에 폭 안긴 정자
여름을 바닷가에서 즐기셨다면 가을에는 계곡 정자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보세요.
우리 선조들은 풍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심신수양을 하였습니다.
‘내 건물이니 나만 쓰겠다’는 욕심도 없었습니다.
정자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길손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꼴을 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지요.
마을마다 멋진 정자를 세우고 길손을 대접하는 전통을 되살리면 어떨까요.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자가 여럿인 곳이 함양의 화림동 계곡입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를 따라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이 있습니다.
동호정(東湖亭)에서 눈여겨볼 것이 누하주(누마루 아래 기둥)와 계단입니다.
구불구불 제멋대로 자란 원목을 그대로 쓴 누하주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보기 힘듭니다.
한국인의 자연 친화적 성격이 잘 드러난 것입니다.
통나무 두 개를 파서 만든 계단도 누하주와 형제처럼 보입니다.
누마루에 오르면 강 속에 ‘차일암’이라는 넓은 너럭바위가 눈에 꽉 찹니다.
100여 명이 야유회를 해도 여유가 있습니다.
동호정을 높이 지은 이유가 차일암을 잘 보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호정 마루에서 책을 보거나, 차일암에서 탁족을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계곡 맨 아래, 1000여 평이 넘는 달바위에 있던 농월정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함양군 예산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후손 한 분이 반대를 해서 못 지었답니다.
본래 후손들이 모금을 해서 지었던 정자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은 참 알기 어렵습니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동호정을 찾은 휴양객들이 경치를 즐기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넓은 바위가 해를 가릴 만큼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이다.
동호정
농월정 터
군자정
거연정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럴 땐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근 후 정자에 올라 매미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베어 물면 그만인데….
숲 그늘 좋고 계류가 쏟아지며 선들선들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 주는
‘정자’는 8월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이다.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이면 으레 하나씩 들어서 있는 정자는 옛 양반들이
음풍농월을 즐기던 놀이터이자 세상을 논하던 곳이었다.
정자의 고장 ‘함양’은 예부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리는 선비의 고장이다.
무려 80~100여 개에 달하는 정자와 누각이 함양군 내 경승지마다 빼곡히 들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남덕유산(해발 1507m)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 서하를 흘러내리면서
기이한 바위와 담, 소를 이룬 화림동 계곡은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하여
8개의 못마다 하나씩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강변 바위에 남천정, 경모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등
유서 깊은 정자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은 조선후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정자들이다.
한때 화림동 계곡을 대표했던 농월정(弄月亭)은 안타깝게도
지난 2003년 방화로 모두 소실돼 받침돌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고요한 밤에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한다’는
농월정 계곡의 하얀 너럭바위와 맑고 투명한 계곡물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지족당 박명부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웠다.
이곳에서 2km가량 올라가면 경모정(景慕亭)이다.
계은 배상매 선생이 조선 영조 때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1978년 건립했다.
여기서 다시 1km 정도 가다 보면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동호정이 나온다.
냇물 가운데 넓게 펼쳐진 암반과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등에 업고 신의주까지 피란을 갔던 동호 장만리 선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890년께 세웠다고 한다.
정자 앞 계곡에는 큰 너럭바위가 섬처럼 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차일암(遮日岩)이다.
‘해를 가릴 만큼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은 한꺼번에 500여명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며 모래톱도 있어 많은 휴양객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탁족을 즐긴다.
동호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투박함을 자랑한다.
2층 누각을 오르는 계단은 통나무를 잘라 층계를 만들었고,
울퉁불퉁한 기둥은 자연목 그대로를 가져다 써 멋스럽다.
다시 길을 재촉해 도착한 군자정(君子亭)은 소박하지만 기품이 느껴진다.
단청 하나 없는 무채색으로 원목 그대로의 자연미를 살린 모습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조선 5현이며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1802년 세웠다는 이곳은 군자가 올라 쉬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군자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규모는 작고 아담하지만 강렬한 남성미가 느껴진다.
더위를 피해 서늘한 정자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는 휴양객들의 모습이 정겹다.
아쉬움이 있다면 주변에 음식점, 숙박업소 등이 생겨나면서 고풍스런 옛 멋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변 경치가 수려하기로는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최고다.
군자정과 100여m 사이를 두고 있는 거연정은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진시서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72년 세웠다.
두문동 72현이란 고려가 망하자 벼슬과 명예를 버리고 숨어든 72명의 선비를 뜻한다.
정자로 가기 위해 ‘화림교’ 구름다리를 건너니 삐걱거리는 철교 소리가
주변의 고즈넉한 풍경을 깨운다.
거연정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하얀 암반과 노송이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강 한가운데 바위에서 130여년 동안 비바람과 홍수를 견디어낸
거연정의 자태가 신비로울 따름 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물을 옛 선비들은 ‘방화수류천’(訪花隋柳川)이라 불렀는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이 담겨져 있단다.
이처럼 함양에 정자가 많은 이유는 사화 이후 중앙 진출이 막힌 영남의 선비들이
계곡과 강변의 경승지를 찾아 정자를 짓고 시서(詩書)를 논하며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란다.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를 찾아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 지도>
<육십령 넘은 함양이 지척이네>
대진고속도로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교통 통로가 되었다. 진주와 삼천포 그리고 통영과 거제도를 하루 생활권으로 좁혀 놓았다.
그 중에서도 함양과 산청 그리고 거창 지방에 있는 산을 찾기엔 제격이다. 멀기만 했던 경남 지방의 명산을 쉽게 찾을 수 있음에 그 지역 문화와 명소를 관광하기에도 훨씬 수월하다.
경남 함양을 일러 정자의 고향으로 부르는데 그것은 정자가 많다고 하는 것이 지역의 경치가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경치가 수려하다는 뜻이다. 산 높고 물 맑으니 풍류를 쫒아 선비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하다.
자료에 의하면 함양 지방에는 86개의 정자와 누각이 곳곳에 산재하고, 충효열녀비가 62개, 향교서원이 12개나 있는데 그중 남덕유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는 안의면 화림동 계곡이 유명하다.
여덟 개의 연못마다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불리기도 했다.
본래 화림동(花林洞)이란 꽃과 나무가 무리지어 피고 자라는 곳이란 뜻인데, 남덕유에서 흘러내린 금천(錦川)이 서상과 서하면을 따라 안의면까지 흘러내리면서 만들어낸 소와 담 그리고 기이한 바위와 꽃, 숲, 계곡이 어우러져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선경에 선비들이 쉴만한 자리를 만든 것이 정자인데 대부분 기이하고 널찍한 바위에 위치하며, 흘러가는 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을 배경으로 건축된 것이 산 속 깊은 곳에 정자를 지은 전라 지방과 비교된다.
<화림계곡 탐방 안내도>
<거연정>
<금천 건너에서 본 거연정>
<금천과 거연정>
<거연정에 걸린 현판과 액자>
<거연정의 자연 그대로의 정자 기둥 모습>
<거연정>
거연정(居然亭)은 정선 전 씨의 중시조이며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이신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산세가 험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봉전마을에 자리를 잡고 번성할 때 그 후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872년 건립한 것이다.
흐르는 계곡물과 우거진 숲, 구름다리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비경은 자연과 하나 되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불러온다. 거연정의 풍광은 지나는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을 수 있는 풍류의 세계를 선사하기도 한다.
주변에 마주 보이는 괘관산과 뒤편의 황석산이 있으며, 항일 의병 활동을 한 문질러서, 전성범 대장의 공적비가 있다.
다소 어색한 철제다리 아치교가 거슬리지만 건너 다리 부근에서 보이는 거연정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화림교 아치를 건너면 정자 앞을 흐르는 바위에 방화수류천(訪花隨柳川 :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간다)이라 불리는 각자를 만난다.
정자에 오르니 정말 시원한 계곡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로 온몸을 파고 든다. 정자는 중간에 칸막이 방이 있는데 책읽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란다.
거연정에 앉아 금천을 바라보니 자연의 호젓한 정취와 흐르는 물소리에 오침을 청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지없다.
빛바랜 정자의 현판들이 글씨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지만 역사의 흐른 세월을 대변하듯 뚜렷한 글씨체를 뽐낸다.
그중 전재학의 거연정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산사(西山祠)의 옛터 서쪽 물 위의 반석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써서 '거연(居然)'이라 한 것은 주자의 시 '거연천석(居然泉石)'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천석의 아름다움과 운림(雲林)의 화려함은 이 정자에 이르는 사람들마다 보고 감상할 것이요, 또한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은 기암괴석이나 숲이 없는 다만 아름다운 곳의 유람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운림의 화려함을 거연정 정자에서 논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거연정기에는 “영남의 빼어난 경치는 삼동(三洞 : 심진동, 원학동, 화림동 등 덕유산 남쪽에 형성된 세 고을)이 최고가 되고, 삼동의 경승은 화림동이 최고가 되나니, 화림동의 경승은 이 아름다운 곳에 세운 이 정자를 최고라 할 것 인 바”라며 이곳의 절경을 칭송했다.
주변 군자정과 영귀정이 어울린 방화수류천의 거연정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아름다운 정자의 하나이다.
<방화수류천의 각자>
<거연정의 물에 비친 모습>
<군자정>
거연정 바로 아래에는 군자정(君子亭)은 거연정과는 다르게 길가 민가의 마당 옆 바위위에 위치하는데 매우 남성적 모습을 띄고 있다.
조선조 5현이며 동국 18현 중의 한 분이신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 선생의 처가 마을이 서하면 봉전마을이다. 일두선생이 처가 마을에 오면 자주 찾아 쉬던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정선 전 씨 문중의 전세걸(全世杰) 등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802년 건립하였고, 군자가 올라 쉬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君子亭)이라는 이름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주이에 우거진 나무들과 바위틈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건너 절벽의 비경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움을 뽐낸다. 정자 위에 오르면 수많은 선비들의 현판 액자가 갈려 있고, 금천 냇가의 시원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계속 불어와 마음속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옛 선비들이 시와 노래를 절로 지을 수밖에 없을 풍광이 사방으로 창을 이뤄 절경을 보여준다.
특히 군자정은 금천 건너에 있는 영귀정 가는 길에 보면 송림에 보이는 멋진 모습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거연정보다 70년 앞에 지은 정자여서인지 고색이 더욱 창연하다. 거연정 만큼 아기자기한 맛은 없고, 소박하면서도 단출한 모습이다. 거연정에 비해서 관리가 덜 된 것 같고 많이 퇴락된 느낌이다. 군자정도 계곡을 내려다보는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당시는 상당히 명당자리로 보였다. 군자정 하나만 놓고 보면 어느 정자에 비해도 손색없을 터였지만, 옆에 있는 거연정 때문에 빛이 많이 바랜 느낌이고 주변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어 풍광이 많이 가려 보인다.
군자정이라는 정자 이름이 말해주듯이 함양 출신인 정여창 선생은 함양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인물이며, 함양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한양에서 보면 낙동강의 왼쪽에 안동이 있다면 오른쪽에는 함양이 있다. 안동을 대표하는 유학자는 이퇴계 선생이지만, 함양에는 정여창 선생을 이른다. 함양과 안의 사이에 개평마을이라는 한옥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정여창 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규모가 작지만 아담하고 단청이 하나 없이 무채색으로 일관한 모양이 무뚝뚝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바위위에 우뚝한 모습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며 호방한 기운이 가득하다.
정자위에서 느끼는 또 다른 느낌은 아름다운 주변 정경보다 세월이 흐른 시대적 역사성을 더 느끼게 해준다.
오히려 거연정보다 더 시원하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것은 덜 관리되고 거무티티한 정자의 예스러움 때문일까?
<군자정>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군자정>
<군자정 현판과 액자>
<영귀정>
거연정과 군자정 사이에 금천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봉전교다. 이 다리를 건너 천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영귀정을 만난다.
영귀정은 오래된 정자를 다시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옆 절벽에 또 다른 정자를 짓고 있다.
거연정과 군자정이 1872년과 1802년에 만들어 졌지만 영귀정은 최근에 건축된 것이다.
영귀정(詠歸亭)이라는 뜻은 공자와 증점의 대화에 나오는 영이귀(詠而歸)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영귀정으로 들어가는 또는 돌아옴을 읊는다는 의미가 있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영귀정의 이름에서 의미를 논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모두가 세상에 나가서 벼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다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터에서 바람 쏘인 다음, 시를 읊조리다 돌아오겠습니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에 "나는 증점의 뜻에 동의한다"면서 증점의 활연한 마음을 찬동하였다.
영귀정(詠歸亭)이란 이름은 바로 증점의 답변 마지막 구절인 영이귀(詠而歸)에서 따온 것이다. 또 영귀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이호문(二乎門)이라고 한 것은 그의 답변 가운데 욕호기(浴乎沂), 풍호무우(風乎舞雩)의 두호(乎)字를 따서 지은 것이다. 영귀정 발아래로 흐르는 안락강(安樂江)은 그 옛날부터 흐르는 산둥성 곡부(曲阜)의 기수(沂水)를 연상시이다.
東方五賢의 한 분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성종22년)~1553(명종8년))은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면 한 때 독락당 계정(溪亭)에서 보내기도 하였지만, 주로 이 영귀정에 올라 우국과 경세의 노심초사하는 심신을 가다듬곤 했다.
거연정의 조금 아래쪽에 자리 잡은 계곡 위에 놓인 다리의 건너편 강기슭에서 시작이 된 "나무통로" 산책로는 주위의 배경과 어우러져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멋졌다. 군자정과 영귀정을 지나서 한참 아래쪽에 자리한 동호정의 인근에 까지 이어진다.
조금은 오래된 정자의 품위를 갖고 있지 않아 애착이 덜 갔지만 금천의 수려한 모습과 주변 산들과 어울려 아름답다.
숲이 우거져 군자정과 거연정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굽이쳐 흐르는 금천의 시원한 물 흐르는 소리를 즐길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며 주변 고목들과 어울려 아름답다.
<영귀정>
<동호정>
동호정(東湖亭)은 경남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아름다운 화림동 계곡에 자리한 정자이다. 거친 듯 하지만 활달한 이미지의 정자로 화림동 계곡을 대표하는 농월정과 거연정의 중간에 있다.
동호정은 이곳 서하면 황산마을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업고 의주 피난길에 나섰던 동호 장만리 선생께서 훗날 관직에서 물러나서 심신을 단련하고 때때로 낚시질로 소일하던 곳으로, 1890년경에 후손들이 선생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선생의 호를 따서 동호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1890년에 건립된 정자로 그리 오래된 편은 아니지만 동호정의 기둥에서 그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말린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비틀어진 흔적과 나무옹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2층 정자로 오르는 계단 역시 통나무에 도끼질 몇 번으로 요철을 만들어 그대로 계단으로 기대어 놓았다. 정자를 만든 사람의 여유와 배포가 그대로 전해져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동호정 바로 앞에는 화림동 계곡에서도 너럭바위로 유명한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차일암은 넓은 반석으로 이 삼 백 명은 족히 앉아서 쉴 수 있는 크기이다. 동호정에 오르거나 또 차일암에 앉아, 이 차일암을 감고 도는 화림동 계곡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 있다.
차일암은 여름에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차일을 치고 놀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도 영가대(詠歌臺), 금적암(琴笛岩)이라는 각자가 보이고 가야금과 피리를 불며 가무를 즐겼다는 뜻이다.
하얀 너럭바위 차일암에서의 풍류를 즐기는 선조들의 모습을 난간에서 떠올리는 맛도 동호정의 일미다.
노송과 그럴듯하게 어울린 모습을 차일암에서 보노라면 선경이 따로 없다. 금천에서 흘러든 물이 담을 이뤄 근처 숲의 푸른 빛깔을 반사한다.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동호정을 오르면 주변 경관이 너무도 아름답고 운치 있게 다가온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비뚤어진 기둥과 나무옹이 자연적인 모습을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정자 둘레에 달린 편액과 액자를 보는 행운을 누린다.
선명한 필체의 시들과 동호정기 그리고 중축한 내용을 담은 중수기와 상량문 등이 있다. 그 중 공자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있는데 후손들에게 안빈낙도와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경개하는 좋은 내용이다.
萬代不易 道說大聖 孔子七十四歲 一生終이라 적힌 마지막 그림에서 제자들이 슬피 우는 장면이 감동을 준다.
정자 누각 어디에도 인생의 생노명사와 희로애락이 묻혀 있어 그저 경치와 절경에 빠진 우매한 인간의 텅 빈 뇌리를 적셔준다.
또한 대들보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거연정 인근에서 시작된 산책로는 굽이굽이 동호정 앞까지 연결이 되어 풍치와 멋을 더하며 동호정 앞의 너럭바위로 유명한 차일암(遮日巖) 가장자리로 물이 흘러가도 건널 수 있게 돌다리가 놓여있어 이 또한 운치가 있으며 소싯적 동심의 세계로 잠시 떠올리게 한다.
누각과 서까래 사이로 밀려드는 차일암과 담을 이룬 금천의 한가한 정경이 너무도 여유롭다.
동호정 옆에는 장만리(章萬里) 충효정려가 있는데 동호(東湖)의 충성을 기리는 비각이다.
동호는 자는 문숙(文叔)이며, 이름은 장만리이다. 천성이 호탕하고 영매했으며 당시 사림의 추앙을 받는 충의지사였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상륙하여 북진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게 되었을 때 선조 임금을 업고 수십리 길을 재촉하였다는데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영세불망자(永世不忘者)라는 교지를 하사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서 40세에 죽었는데 그 후 1891년(고종 28)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고, 정려가 명해져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초현(招賢) 동호정 앞에 정려비각이 세워졌다. 이 비문은 판서 송병서가 썼고 그 유지로 차일암에 동호정이 세워진 것이다.
<동호정>
<동호정 앞 노송과 차일암>
<동호정 현판과 액자>
김재현(金在顯)의 동호정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화림은 산수(山水)의 고을이다. 그 봉우리가 우거지고 숲이 깊으니 황석산(黃石山) 아래 초현(草峴)마을이 있다. 물결이 아름답고 암석이 기이하다. 옥녀담(玉女潭) 가운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대개 사람이 산과 물을 얻어서 산수를 즐기니 사람으로 인해 차일암도 중하게 되었다. 바위 위에 장처사조대(章處士釣臺)라 글자를 새겨져 있고 다섯 채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공(公)이 물을 얻음은 물이 인지(仁智)의 낙(樂)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터에다 정자를 짓고 조상과 선조(祖先)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알려 지금부터 후까지 차일암(遮日巖)이 사람으로 인해 山水가 중(重)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또 상량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적혀 있다.
백운산 동쪽 맥이 굽이쳐서 형국을 열었으니 황석산의 남쪽 다리가 구불구불 이어진 모양이 장호암과 차일암이다. 사시에 노닐고 구경하기 알맞고 주가대와 금적대에는 모두 여러 뭇 손님이 모여드니 푸른 이끼 조대 위에 어가를 서로 화답하고 복사꽃 기슭아래 술잔을 마주 치며 여러 봉우리 끼고 서서 그림의 주렴을 구름밖에 펼쳤으며, 급히 흐르는 물 부딪치며 돌아서 큰 종을 돌 위에 걸었다.
<동호정 대들보의 여의주와 물고기를 문 용 모습>
<공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그림>
<동호정을 통해 보이는 금천 모습>
<나무 등걸을 도끼로 빚은 계단>
<차일암과 차일담>
<정려비각>
<영모동 계곡 암석 각자>
<경모정과 람천정>
동호정에서 금천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호성교를 지나 호성마을에 닿는다. 나무로 만든 산책로가 계속 이어져 호성마을을 지나고 과수원 아래 아름다운 경모정을 만난다.
경모정(景慕亭)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무열공 배현경(裵玄慶)의 후손인 계은 배상매(裵尙梅)가 영조 때 산청에서 이 곳 호성마을로 이사를 와서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이다.
경모정은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8년에 건립한 것인데 계곡의 소(沼)가 주변의 넓은 바위와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무척 뛰어나다.
특히 달 밝은 밤에 정자에 앉아 떠오르는 달을 바라볼 때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한다.
비단 내라 불리는 금천은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을 만들고 굽이쳐 흘러 비경을 일군다. 요소마다 위치한 정자들이 일품 경관을 형성하지만 경모정 또한 다른 정자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큰 바위에 적힌 배문석 영모동(詠慕洞)이라는 글귀는 배현경, 배상매 후손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경모정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가면 람천정(藍川亭)을 만난다.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매실이 너무도 풍성하다.
람천정은 근래 새로 세운 정자인데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이곳 화림천 정자 순례의 좋은 쉼터로 각광 받는다.
금천을 건널 수 있도록 바위마다 연결된 다리를 지나면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 청년들 몇 사람이 숯에 고기를 구우며 잔을 기울인다.
흐르는 물소리와 정자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 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풍류 정경이다.
<경모정>
<람천정>
<거연정에서 시작된 정자 순례 오솔길이 끝나는 람천정>
<황암사>
<농월정>
거연정과 군자정의 정취와 동호정의 풍류 그리고 영귀정, 영모정, 람천정의 운치를 눈과 가슴에 담고 금천을 따라 흐르면 굽이치는 모퉁이를 돌아 까마득한 산정을 본다.
전쟁의 상흔으로 구천을 헤매는 영혼이 함께 모여 나라의 평안과 후대의 안녕을 기릴 수 있는 안락한 명소가 양지바른 황암사에 가득하다.
정유재란 때 2만 7천명의 왜적을 무찌르고 장렬히 산화한 호국 영령의 터전, 마지막 육박전으로 항전하여 황석산성은 지켰으나 무자비한 살육으로 비명은 골을 메우고, 계곡은 피로 물들었다.
숙종 40년(1714)에 황암사라 사액되어 위령제를 지내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행사마저 중단된 추모행사가 지속될 수 있음이 산천경개의 수려함으로 초록 물결이 짙은 계곡에 숙연하다.
<황암사>
<종담서원>
<농월정>
황암사를 지나 조금 가면 물소리가 너무도 시원하다. 노송에 가린 너럭바위는 보이지 않지만 상점과 주차장 그리고 서당의 오래된 기와가 길손을 반긴다.
아치형 다리를 지나며 금천이 만들어 논 옥담(玉潭)이 산기슭에 아름답다. 산길을 지나 시원한 물줄기가 넘치는 바위들 사이로 산경이 수채화처럼 구도가 안정감을 준다.
사진으로 보았던 농월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건만 넓적한 바위위에 새겨진 글귀가 시선을 끈다.
지족당이 정자 앞 오른쪽 암반을 지팡이 집고 다녔다는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는 후손들이 새긴 글자인데 매우 힘 있고 명필이다.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함양 안의면 성북마을 출신인 지족당 박명부(1571~1639)이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하여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와 은거 생활을 할 때 너럭바위와 주변 경관이 수려한 이곳에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하며 지은 것이다.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 등을 한 후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이다.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 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이 한 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는데 주변 풍광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다만, 2003년 가을 어느 소인배의 방화로 소실되어 농월정 편액과 시가 적힌 액자들이 타버렸다. 함양군청의 복원을 위한 노력도 토지 주인들의 갈등으로 무산되고 있다니 아쉽기만 하다.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낙향해 1637년 처음 초가로 건립된 이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 완성된 이 정자는 기둥이 물에 잠겨도 썩지 않는 밤나무로 12지주를 만들었고, 상판만 소나무로 만들었다.
화림동 계곡에서 달을 담고 있는 작은 웅덩이를 만든 월연암을 내려다보며 세워진 농월정(弄月亭)은 정자의 백미이자 선비문화의 상징이다. 농월정 앞에 흐르는 물이 비단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사람들은 비단 錦 내 川, 錦川이라 불렀다.
<화림동 계곡 월연담>
물길이 휘어지면서 돌아가는 곳에 시원한 너럭바위와 빽빽한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았고, 정자 터 앞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월연암(月淵巖)에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혹은 급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기도 하는 물길의 흐름을 감상하기도 좋다.
장복추(張福樞)의 <농월정중건기(弄月亭重建記)> 중에 다음과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안음(安陰)의 월연(月淵) 위에 농월정(弄月亭)이 있으니 옛날 판서를 지낸 지족당(知足堂)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중략) 연못 위의 밝은 달은 무진장(無盡藏)이라 가져도 다 함이 없으니 읊고 희롱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니.
아! 달이 사람인가 사람이 달인가! 저 바다 밑에서 나오는 기상을 완연히 보고 천심(天心)에 이르니 맑은 의미를 얻었을 것이다. “
또 농월정운(弄月亭原韻)에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길옆에 누가 別區의 그윽함을 알리요
산은 둘러 감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돌층계 지당(池塘)에 비취니 맑음 다시 가득차고
창을 두드리는 듯 푸른 기운 겉이어 뜨네.
아이들 주려 죽으로 호구(糊口)하여도 원망치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 부딪혀도 협의치 않네.
한가한 사람 할 일이 없다 말하지 말게
만년에 구학에 거니니 또한 풍류일세.
<화림동 각자>
<지족당장구지소 각자>
<2003년 소실된 농월정 터>
농월정 월하기(弄月亭 月下記 )에는
새하얀 달빛이
슬프도록 애절하구나.
계곡 반석 위
흐르는 물소리 정겹고,
이따금 불러주는 청풍이
가을의 문턱에 선 가난한 旅心을 울리는구나.
달이 나를 부르는가!
내가 달을 부르는가!
처마 밑 산마루에 걸린 달에
狂人인양 넋을 놓네.
물안개 자욱한 저 깊은 계곡위에선
신선들이 노닐고 있고
나 여기 신선들이 놀던 자리에서
밤을 지새워도 좋으련만
서산에 닭이 우니
애달파 한숨 짖네.
농월정 중건기에 전하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東湖公原韻三首 동호공원운삼수
遊遮日巖 유차일암(차일암에서 노닐다)
홀로 바위 위에 와서 앉으니 (獨來巖上坐 독내암상좌)
산은 고요한데 흰 구름만 짙어가네. (山靜白雲濃 산정백운농)
물은 꽉 차서 그 밑에 쌓이니 (積水盈其下 적수영기하)
참된 근원은 이 가운데 있구나. (眞源在此中 진원재차중)
망천(輞川)의 냇가에 별업(別業)을 열었고 (輞川開別業 망천개별업)
기산(箕山)이 묏뿌리에 남은 풍치(風致) 우러르네.(箕岫仰餘風 기수앙여풍)
한 곡조 풀꾼들의 노래 소리 그치니 (一曲芝歌歇 일곡지가헐)
신선의 늙은이를 거의 옳게 만나리라. (仙翁庶可逢 선옹서가봉)
<소실되기 전 중건된 농월정 모습>
<농월정 가는 중간에 있는 종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