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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 종점투어 [매일신문]...8
최두호
2017. 11. 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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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흐르는 꽃의 언덕인 화원동산의 절경을 읊은 ‘상화대 10경’이라는 한시(漢詩)에서 엿보이는 화원유원지의 풍경은 가을 들녘의 평화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금호강과 진천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넓은 모래사장과 흐드러진 버드나무 숲의 경관이 뛰어나 대구시민들 최고의 행락지로 각광을 받았던 화원유원지. 한 때 옛 31번 버스 종점으로 연중 행락객들로 북적됐지만 이제는 번호판이 650번으로 바뀐 버스가 고령 다산면 아파트지구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종착지가 아닌 경유지가 됐다. 그나마도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낙동강 모래사장과 숲 그늘이 유지돼 시민들의 인기 피서지였지만 도시 팽창과 함께 강변 정취가 사라져 현재는 달성군 외곽을 순환하는 지선 버스(달서3번) 종점인 화원동산만이 옛 영화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 위치한 화원동산은 신라 때부터 ‘화원(花園, 아름다운 동산)’으로 불려졌으며,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의 높은 절벽을 끼고 쌓은 토성(土城)이 있는 산동네라는 뜻에서 인근 마을은 ‘성산리’가 됐다. 신라 때 축조된 토성의 모양이 잔과 같이 생겼다 하여 ‘배성’ 또는 ‘잔뫼’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1928년 처음 조성된 유원지는 1958년 새로 단장, 30년 후인 1978년 동산으로 재개장한 것. 조선 초기엔 절벽 아래로 사문진 포구가 있어 일본 무역선이 들락거렸고 1960년대와 70년대엔 이 나루터를 통해 성산리와 고령 다산 주민들이 왕래했다. ‘사문진(寺門津)’이란 이름도 신라시대부터 나루터를 중심으로 양쪽 약 4km에 걸쳐 많은 절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현재 포구의 흔적은 간곳 없고 올해 개통된 사문진교의 이름에서 옛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화원동산(무료입장)은 입구에서 왼편 성곽을 따라 강변과 대구도심, 고령군 일부를 조망하는 전경이 특히 뛰어나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 성곽은 남 다른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강 건너 노을 속 도심이 한 눈에 들면 아득한 옛 추억의 잔상이 절로 강물에 어른거린다. 가을 빛 완연한 강물을 따라 화원동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인 팔각정으로 가는 길. 안동댐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3칸짜리 기와집, 화원정은 아담하고 예쁜 전통가옥의 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 툇마루에 앉아 내려다보는 강과 들녘이 새삼 살갑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가야산에서 수양 중이던 세자를 문병 가는 길에 이 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9번을 들렀다고 한다. 성산리의 또 다른 마을이름이 ‘구라리’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경덕왕은 이곳에 행궁을 짓고 그 이름을 상화대라고 했다. 4층 건물의 팔각정은 원래 봉수대 자리였다. 화원동산 서편 물알산 봉화신호를 받아 앞산과 팔공산으로 전하면 그 봉화가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까지 전달됐다고 한다. 탁 트인 팔각정에 오르면 성곽에서 보던 때보다 훨씬 멀리 시선이 닿는다. 사문진교로 넘어가는 노을빛에 물든 대구시내와 저 멀리 팔공산과 반대쪽의 가야산을 비롯해 제각각 다른 물빛을 내는 금호강`낙동강`진천천이 고령의 황금빛 들녘을 돌아 유유히 흘러간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일몰은 가야산을 때깔 좋은 오렌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상화대 10경 중 1경이 가야낙조(伽倻落照)인 까닭을 비로소 확인하는 순간이다. 팔각정 앞 6.25당시 대구방어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육군 보병 제8352부대의 필승 기원비를 지나 화원동산 반대편을 걸어 내려오면 도산서원 인근에 있던 송사정과 성산리 제2고분군을 만난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 유병옥씨는 “송사정은 특히 봄철 정자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으로 유명하며 현재 동산 안에 있는 신라시대 호족 무덤인 제2고분군 외에도 동산 밖에서 관리가 안 되고 있는 제1고분군이 있다”고 말했다. 강변에 이르자 노을은 낙조가 되어 서산을 기웃거리고 있다. 사문진교 아래엔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의 흔적과 호국의 의지를 보듬고 있는 화원유원지의 옛 영화가 아쉬운 듯 한 낚시꾼이 연신 낚싯대를 강물에 던져 넣고 있다. 30여년 전 대구시민들이 더위를 피했던 버드나무 숲도 모습을 감췄고 대신 강 둔치엔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 넓었던 모래사장엔 자갈돌이 뒹굴며 잡초만 무성하다. 화원동산에서 논공`현풍방향 650번 버스 방향을 따라 가면 추계추씨의 시조이며 고려 충렬왕 문신 추적(秋適)을 모신 ‘인흥서원’과 맞은편에 ‘남평문씨 본리세거지’가 있다. 명심보감을 서술한 추적 선생을 봉안한 인흥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서원으로 사당 등 5동이 고건물과 명심보감목판 200매를 보관하고 있다. 인흥서원 맞은 편 배산임수의 한옥마을인 인흥마을은 바로 남평문씨의 본리세거지로 크고 작은 60여채의 건물이 오롯한 저녁노을에 자태를 뽐내고 있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이 증시조로 한 남평문씨 문중은 500여년 전부터 이 곳에 터를 잡아 살고 있으며, 마을의 대표적 건물 중 하나인 수봉정사는 세거지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접객과 제자들의 학덕증진을 목적으로 지은 광거당과 서고인 인수문고가 배치돼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도로망 건설과 도시계획 정비가 있었지만 이들 건축물은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전통적인 영남 양반가옥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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