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도덕산
도덕사
- 산행지개요
도덕산은 자옥산과 이웃해 있으며 낙동정맥이 해안가를 타고 줄곳 남하하다
가 이곳 도덕산에 와서는 그 기세를 누그러 뜨리고 내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지점이기도 하며,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702.6
미터의 아담한 산이다.
산세가 그리 빼어나지는 못하지만 산자락으로 유서깊은 문화유적이 흥건하
여 반드시 한 번은 올라야 할 산이다. 국보 40호인 정혜사지 13층석탑이며 조
선시대 영남오현의 한 분이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벼
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우고 기거하신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
과 계정(溪亭)의 즐비한 고목과 중국주엽나무(천연기념물115호)며 명필 한석
봉, 퇴계 이황, 아계 이산해 선생들의 친필 현판글씨며 선조 5년(1572년)에 이
언적선생을 제향하기 위해서 세운 옥산서원(玉山書原 사적154호)과 그곳에 보
관중인 보물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 525호인 보물 삼국사기, 526호인 해동
명적 등 약 230종의 2197권의 책이며, 최근에 세웠으나 먼 훗날 명소로 남게 될
염불종의 총본산인 대가람 대흥사등 자락자락에 둘러보아야 할 곳이 수두룩하
다. 정상의 넓은 반석들에 올라서면 안강벌판과 포항 그리고 멀리 동해바다 및
호미곶이 한눈에 들어온다.
[옥산리에 있는 독락당 전경]
[옥산리에 있는 국보 제 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
[도덕사 오르는길]
[도덕산 아래 있는 도덕사 전경]
[도덕사 옆 전망바위:우측 멀리 보이는 산이 어래산 572m]
[도덕암에서 내려다본 도덕사전경]
[도덕산 정상석:703m]
[도덕산 정상뒷편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전경:옥산지와 어래산]
[도덕산에서 도덕산갈림길 가지직전에 있는 마당바위] |
★ 회재 이언적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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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독락당
종 목 | 보물 제4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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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독락당(獨樂堂) |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
수량/면적 | 1동 |
지 정 일 | 1964.11.14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이해철 |
관 리 자 |
이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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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설명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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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독락당, 그리고 정혜사지 13층 석탑
@.옥산서원
역락문
구인당(옥산서원)
무변루
해림재
양진재
비각
경각
@.독락당
독락당
계정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독락당 별채인 계정
@.정혜사지 13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