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천 기룡산~꼬갈산 (임고서원)
남서 방향의 시루봉과 동쪽 방향의 꼬깔산이 능선을 같이 하고 있으며
골짜기도 깊게 형성하고 있다.
산세도 규모가 크며 넓고, 높낮이와 가파름이 큰 산봉들이 즐비하여 웅장한 면도 있다.
또 남쪽의 산자락 아래에는 영천댐(자양호)이 있어 시원하고 넓은 호수를 굽어보는 맛도 있다.
특히 정상에서는 보현산의 천문대가 건너에 보이고
주변에 산군을 이루는 면봉산, 베틀봉, 수석봉, 운주산이 가까이 조망되며,
서쪽멀리 팔공산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상 바로 아래의 서쪽릉선에 형성된 낙대봉을 비롯한 암릉은 아기자기 하면서
올라 내리는 재미가 산행미를 절정에 달하게 한다.
정상 남쪽의 1km 아래의 산중턱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신라 천년고찰 묘각사가 있는데,
이 산의 명칭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동해의 용왕이 의상의 설법을 듣고자 말처럼 달려왔다 하는 데에서 “기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용의 자세을 닮았다고도 해서 기룡산이라고 하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양면소재지의 산행 들머리인 성곡리에는 영천땜 공사로 이전하여 복원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이 있어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된다.
울창한 산세...
앞에보이는 보현산...중간에보인 도로들이 보기융하네요..
전망 바위에서 바라본 영천댐 풍경..
*. 임고서원 (오는길에...)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임고서원은 고려말의충신인 포은 정몽주선생을 추모하기위하여 조선명종8년 부래산에창건
임진왜란때소실 선조36년 중건사액되엇다
인조21년 여헌 장현광 지붕 황보인 선생 추향하였다
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엇다
1965년복원 포은선생만봉향 1980년보수정화하였다
포은선생은 영천임고면 우항동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태어나
왜구토벌에 공을세�으며 시문서화에도 뛰어났다
공양왕4년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서원앞 은행나무
서원안내문
임고서원 (7년공사 준공)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1553년(명종 8)에 창건되었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셨다.
155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에 옮겨 건립했다.
1643년(인조 21) 장현광(張顯光)을, 1727년(영조 3)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5년에 복원되었다.
영천시 임고면의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조선 명종 8년(1553년)에 선생의 고향인 영천 사람들이 건립했고
소장전적 및 포은의 영정이 보물 제1109호, 제11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도 꿋꿋이 서있다.
대대적 정비사업을 끝나고 유물관까지 준공되면서 찾을 만하다.
그리고 충신이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길 곳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포은의 어머님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까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성낸 까마귀가 흰빛을 싫어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 더러일가 하노라(맑은 물에 깨끗이씻은 네 몸이 더러워질까 걱정이다)
포은이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답한 시조로 알려진 단심가(丹心歌)가
같은 돌에 새겨져 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단심가 원문
차신사료사료 일백번사료(此身死了死了 一百番死了)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야여(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어조사여)
한글로 고친 시조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영일정씨세보〉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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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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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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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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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곳 없네.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 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길 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으음)때론 큰 산 앞에서 무릎 꿇고서 포기도 하려 했어
처음처럼 또 다시 돌아가려고 무작정 찾으려 했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이 웨이)
(후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이 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