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삼척 - 강릉 바다 열차 관광 (2014.6.17)...3
강릉시내..
우리가 타고온 바다열차 내부...
종착지 강릉역에 하차...
강릉 오죽헌에도착...
율곡 이이 선생님 동상
이율곡의 생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 小學集注改本〉·〈중용토석 中庸吐釋〉·
〈경연일기 經筵日記〉 등이 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自警門 : 율곡 선생이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하라는 뜻
신사임당 배롱나무..
율곡 이이 소나무..
율곡 이이선생님 초상화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오죽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申師任堂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經世家요
哲人이며 정치가로서 救國愛族의 대선각자인 栗谷 李珥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經文을 익히고,문장,針工,자수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19년(1564)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
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退溪 李滉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대군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大同法, 社倉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紫雲書院, 강릉의 松潭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儒賢인 崔致雲(1390~1440)의 창건으로 아들 應賢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申命和(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權和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文成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신사임당 초상화...
뒷뜰에 오죽이...
안체..
율곡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