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구-심양-환인-백두산-집안-단동-심양(4박 5일)넷째날..9
내부에서 사진촬영금지라서 밖에서 찍어본사진..
광개토왕 능으로 이동..
광개토대왕 능
태왕능 광개토 대왕비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 로 남아 있는
높이 14,8m, 한변의 길이 가 66m에 이르고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져 있다.
현재는 너무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돌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 볼 수 있다.
현재 광개토 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점도 이색적이다.
한편, 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이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1).이 곳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길 바란다(願太王陵 安如山固如岳)'라는 의미의
명문(銘文)벽돌이 출토되었고,
2).광개토왕비에서도 좀 더 가까우며(장군총은 비석에서 1.3Km 떨어져 있음)
3).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가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태왕릉(太王陵)
태왕릉(太王陵) 입구
석실묘 (石室墓)로 문과 돌로된 통로가 있고 나모난 모양의 석실방에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겉은 프라스틱 틀로 덮여 있는데
대왕과 대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저쪽 산이 북한이다..
다무너진 왕능 모습..
우리가 내려오자 감시원이 나와서 물을 넘어보이는 곳이 북한 산이다....
쯈으로 당겨보니..
장수왕능으로 이동..
장군총(장수왕릉)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1만2천여개의 묘지중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거대한 크기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밑변의 길이 32m, 높이12m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트형 방단계단식 적석묘(方檀階段積石墓:돌을
계단식으로 네모지게 쌓아 올린 형태의 무덤)으로 4세기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 5.4m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1100여개를 계단식으로 쌍아 올렸다.
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퉁이는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
북동쪽에 백두산 천지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릉의 맨 위층인 제 7층의 사방 변두리에는 난간 구멍이 있는데 피라미드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시설로 보이는 일종의 향당(享堂)이 있엇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호석(護石)과 그 주변의 배총(陪塚)이다.
그리고 ,장군총의 '장군'이란 중국서는 '큰 것','위대한 것'을 총칭하는 뜻이 있으며
장군총은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대 정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릉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인데 아직 분명하지 않다.
호석(護石)이란
받침돌 혹은 호석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세운 것.
장군총에는 3개씩 4면에 총 12개가 있는데 12지상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현재는 그 중에 하나가 소실되었다.
<호석(護石)1
<호석(護石)2
<화강암은 전반적으로 붉은 빛을 띄고있다
<호석 하나의 무게만도 100ton쯤 된다고 한다
가이드 장수왕능에 대해 설명..
아곳에 호석이 하나 없어졌다..그래서 내부에 있던 돌들이 밀려나와 있다..
호석이 없어져 기단이 갈라지고 틈이생겨 내부에 체워넣은 돌들이 삐져 나오고있다..
원래는 5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는 배총(陪塚)
과거에는 장군총의 네 모서리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
부장품등을 넣어 두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하고,혹은 왕비의 무덤일꺼라고도 한다..
쥼해서본 북한산에 제련소 꿀뚝이..
다 도굴되어 왕능 내부를 볼수가없어 오회분을 구경하기위해 이동..
우산하 고분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 분묘, 집안고구려 유적지에서 화강석의 벽에 그림이 그려진 5개의 석벽화 고분을 '오회분'이라고 하며 그 중 다섯번째 묘가 바로 오호묘(五號墓)이다.
큰 봉토분 다섯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같다 하여 '투구회'를 써서 오회분이라고
하며, 그 중 다섯번째에 해당하는 분묘라는 뜻으로 '5호묘'라고 칭한 것이다.
5호묘는 4호묘와 정문을 사아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 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1962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발굴 정리되었기 때문에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과연 '고구려 유적의 꽃' 이라 할 만하다.
6세기 중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8m, 무덤 둘레가 180m,
벽화의 내용은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 양식에 따라 '우주의 방위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圖)가 네벽에 청, 백,주, 흑 네가지 빛깔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으며,
각종 문양들이 짜임새 있게 그려졌다.
인류 문명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 하여 풍부한 설화성을 지니고 있다.
조벽지법( 돌 위에 직접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하여그리는 법) 으로 그렸기 때문에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집안의 20여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곳.
묘실에 들어서 계단을 세걸음만 내려가면 시원함이 느껴지고,
내부에는 3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피장자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
사신도가 그려진 사신총, 무용과 생활상이 그려진 무용총, 씨름을 하는 모습이 그려진 각저총등이 인근에 있다.
신라나 백제의 고분과 다른점은 밑변이 원형이 아닌 사각형이다.
오호묘 입구..
점심긱사를위해 이동.. 한글 간판도보인다..
점심식당에 도착..
맥주로 건배 하며 목을 축이고 현지식으로 식사...
식사후집안에서 단동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