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청량면 양호단소는 중시조 소판공 거명의 사단을 모신 곳이다. 소판공은 고려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 이제현의 묘지문에 그 선대가 신라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조이후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가 되었다. 이로써 경주이씨 소판공으로 중시조로 문중사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때 소판의 벼슬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판공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으로 번성하여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백팔십두분, 재상 여덟분, 공신 열두분, 청백리 열분으로 이 땅에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2. 경주이씨 분적
옛말에 이씨는 모두 경주이씨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경주이씨는 이씨 성 가운데 사성의 으뜸 종문으로서 진주, 원주, 재령, 아산, 평창, 우계, 차성, 합천, 장수, 진위, 덕은, 울산, 영천 등의 이씨는 모두 경주이씨의 분적 종파이다.
고려말 문하평리를 지낸 열현공 핵은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김씨가 친히 글과 사기를 가르쳐 삼형제가 모두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열현공의 세 아들 인정, 진, 세기로부터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각각 평리공파, 익재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를 형성하였다.
5. 성암공 이인정
평리공파 파조인 성암공 인정은 문하평리로 있을 때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부당한 관리임명에 반대하여 임용서류에 서명을 거부 정직을 당한 일이 있었다. 성암공의 처자인 우헌납공 규 역시 왕이 승려에게 관직을 내리자 유배를 감수하면서까지 서명날인을 거부하여 나라의 법을 천하에 밝혔다.
6. 진서공 3세(이원선, 이진, 이인생)
우헌납공의 정지인 진서공 원선과 검교국기감공 의반 형제분의 후손이 지금의 평서공파를 형성하고 있다. 병판공 이석 검교국기감공의 손자인 병판공 석은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 날로 어지러워지는 정치상황에 실망하여 행적을 감추고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7. 송탄공 이원
송탄공 원은 성암공의 8대손이다. 기묘사화로 뜻있는 선비들이 화를 입자, 전라도 고부로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으니 파조이하 평리공파 후손들의 절의가 대개 이와 같았다.
8. 동암공 이진
9. 익재공 이제현
열현공의 차자인 동암공 진은 아우인 세기와 더불어 왕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에 천장급제하여 대사성, 정당문학을 역임하며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그 슬하에서 고려 최초의 학자가 탄생하니 익재 이제현 선생이다. 익재공의 세 아들 서종, 달존, 창로의 후손들이 익재공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가. 판윤공 이지대
시랑공(侍朗公) 서종(瑞種)의 증손인 판윤공 지대는 단종 복위를 꾀하는 사육신의 거사소식에 호응하여, 한성판윤의 벼슬을 버리고 벽촌에 우거하였다.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거처에 손수 심었다는 수령 오백살의 은행나무는 세월을 뛰어넘는 충절의 의미를 전하는 듯하다.
나. 운와공 이달존
운와공 달존은 열여덟에 등과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나 왕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병을 얻어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순직하였다.
다. 청호공 이회
운와공의 증손 청호공 회는 이조참의와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겸 출척사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임지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라. 밀직공 이창로
익재공의 삼남으로 개성윤에 올랐던 밀직공 이창노. 밀직공은 우리국토를 침략병합하려는 원나라와 친원파 세력의 책동을 예견하고 이를 적극 방어 견제하여 나라와 왕실이 보존에 신명을 다하였다. 당대의 석학이자 충신이었던 익재공의 음덕 때문이었을까? 대대로 학문과 절개가 빼어난 자손들이 푸르게 일어나니 익재공파는 문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창 한 대종 문으로 일컬어진다.
10. 송암공 이세기
송암공 세기를 주벽으로 모신 단구서원, 송암공은 천장 급제하여 대제학과 검교정승 직을 지냈다. 슬하에 네 아들 또한 잇달아 대과에 급제 문명이 일세에 떨치니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맥금리에 설단 하였다. 송암공의 장남 천은 국당공파, 차남 매는 부정공파, 삼남과는 상서공파, 사남 조는 사인공파를 형성하였다.
가. 국당공 이천
국당공 천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얻고 왕에게 경서를 시강하였다.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재상급인 문하시랑평장사와 월성부원군의 봉호를 제수 받았다. 네 아들 문정공 경중, 판서공 배중, 제정공 달충, 정순공 성중의 후손이 국당공파의 세계를 계승하였다.
(1) 문정공 이경중
장남 문정공은 국방과 치안을 담다하는 삼중대광 중서문하 판병부사를 역임하고 월성군을 봉분 받았으며 국당공의 증손 정보는 태종조에 선비들이 정승보다 높이 쳤다는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2) 제정공 이달충
제정공의 본래 이름은 달중 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달충으로 고쳤다 한다. 도순문사 퇴임시 전별주석에서 이성계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후손을 부탁하니, 태조가 자손들 이름에 설립자를 넣도록 했다고 한다.
(3) 정순공 이성중
고려말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던 정순공 성중은 고려의 명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조선개국에 분골쇄신하여 개국원종공신으로 좌정승에 올랐다.
(4) 월파공 이제
재정공의 증손인 월파공 재는 단종조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시작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했다.
(5) 부정공 2세 3공
경북 금릉군 계룡면 양촌리 부정공 2세 3공 사단. 부정공파는 매를 파조로 전법판서 오성군 경지와 수찬 경원의 후손들이 세계를 형성하였다
(6) 부정공 이매
부정공은 형제분인 국당공, 상서공, 사인공, 사촌인 익재공과 더불어 당대 으뜸가는 문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묘소와 사적이 모두 실전되어 그 혁혁했던 발자취가 전해지지 않으니 애통한 일이다.
가. 상서공 이과
상서공 과 역시 고려조 상서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일언일사도 전하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고려말 세상이 날로 혼탁해지는 것을 보고 산림에 물러 나와서 세상일에 간여치 않는 까닭인가 한다.
(1) 지인주사공 이원보
묘소 또한 실전되어 평택군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 아래에 아들인 지인주사 원봉와 양태분의 사단을 배설하였다.
상서공파는 조선조에 정승이 여섯분, 행직판서가 십여 분이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국충절에 앞장섰던 공신도 여러분이 있어 인재의 가문으로 일컬어진다.
나. 사인공 조
사인공 조는 일찍이 학덕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강직 고절한 성품으로 인하여 화를 입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곽산으로 배소를 옮겼다. 이성계가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개국하자, 두문동에 우거하며 조선왕실의 입조 권유를 끝내 뿌리치다.
두문동 청절사에 배향된 절신 이십인 중 한분으로 8세손 촌림, 춘우 형제분 또한 병자호란 중에 순절한 하늘이 내린 충절의 가문이다.
11. 판전공 이강 사단
判典公派(판전공파)에 대하여
공의 휘는 강으로 시조로부터 50세손이 되며 중조 소판공(蘇判公)의 15세손으로서 정순대부(正順大夫)판전객시사(判典客侍事)의 벼슬을 하셨으나 난중(亂中)의 화를 피하여 산중촌락에서 독서만 즐기셨다.
공의 백형은 휘 핵으로 字(자)가 만리요, 호는 悅軒(열헌)으로 문하평리의 벼슬을 하셨고 상서좌복야로 증직 받으셨다.
열헌공이 슬하에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첫째가 성암공(誠庵公) 휘 인정, 둘째가 동암공(東菴公)휘 진, 셋째가 송암공(松巖公) 휘 세기이며, 공의 중형인 휘 翩(편)은 아들이 직간(直幹)으로 장수이씨로 분적 되었다.
공의 아드님은 휘 신유(臣裕)로 봉익대부예의판서를 지내셨다.
공은 14개 대파중에서 아홉번째 대종으로 첫손자가 낭장 휘 원무(元茂)이시고, 아들 첨정공 휘 운경(雲敬)에서 5개 중종으로 분파하고, 판서공의 둘째 아들은 병정공 휘 문저(文著)로 그 아래로 예빈시 봉사공휘 태(泰)를 두셨다.
5개 중종은 첫째가 비순위중랑장 휘 修(수), 둘째는 휘 耕(경)인데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해온다 셋째는 감찰공 휘 자이고, 넷째는 예의판서 휘 오, 다섯째는 훈련원판관 휘 사이다.
공은 고려 문관위계의 정순대부라는 품계로 정3품 당상관이시니 고려 25대 충렬왕34(1308년)에 여러 관계를 고치면서 새로 제정된 사실을 고려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충렬왕때 품계를 보면 당상관으로는
정1품 : 삼중대광(三重大匡),종1품 : 중대광(重大匡),
정2품 :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 : 통헌대부(通憲大夫)
정3품 : 정순대부(正順大夫),
당하관으로는 정3품 :봉순대부(奉順大夫),종3품 :중정대부(重正大夫)/중현대부(重顯大夫), 정4품 : 봉상대부(奉常大夫),종4품 : 봉선대부(奉善大夫)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객시라는 관사가 의부(그 뒤 고려 26대 충선왕 2년 1310년에 예의사로 개칭)에 배속되어 외국의 사신 또는 빈객을 영접하고 왕실과 재상들의 주요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으뜸은 판사(判事)이다.
공은 어느 때 계셨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 당시 밀직승지인 동암공 휘 진이 공의 큰집 둘째조카이며 충렬왕 13년(1287)에 공의 연세가 44세로 추정하여 볼때 익재공이 태어나셨으니 공이 익재공의 종조부가 되시고 동암공의 막내 삼촌이 되시매 그때 공의 연세가 동암공과 몇 세차이가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대적으로 공께서 판전객시사라는 벼슬에 계실때 충렬왕 24년(1298)경부터이며 공의 연세가 68세가 되시든 1308년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공께서도 낙향하신 걸로 추축된다.
공의 관직인 정순대부 판전객시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시기 …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이며
품위 … 정3품 당상관이고
관사 … 전객시로 지금의 의전실이 되며
직위 … 판사(判事/정3품)으로 지금의 의전실장이셨다.
공의 묘소는 실전(失傳)으로 후손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다가 서기 1988년 중시조 동역 내인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 양천부락 후원에 설단하고 단비를 세우니 이제 공의 크나큰 자취를 남기시게 되었다. 매년 음력 9월 하정일(下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울산 양천의 감찰공(휘 자)의 7세손인 휘 석종은 초휘가 석숭, 수문장으로 창궐하여 선무3등공신으로 울산읍지에 기록되었다. 울산 양천의 소판공 사단은 감찰공의 후손들이 설단, 수호하고 있다.
判典公파의 파조인 강은 득견의 삼남이며 열헌공의 막내아우가 된다. 벼슬은 고려조 정순대부 판전객시사를 역임하였고, 아들 신유는 봉의대부 예의판서에 올랐다.
원무, 운경을 거쳐 공의 고손 수, 경, 자, 오, 사등 다섯 형제의 후대가 계대를 번창하게 이어지고 있다.
휘 운경의 넷째 오의 아들 휘 눌이 사정공파 파조이며, 셋째아들 휘 자가 감찰공파 파조이며, 첫째 아들 수의 증손자 휘 을규가 호계공파의 파조이다.
가. 호계공 이을규
휘는 을규(乙奎), 자는 문경, 호가 호계(虎溪)와 양졸당(養拙堂), 1508년 남중리서 출생, 랑장공(휘수)의 증손, 1531년 진사와 생원급제, 1532년 호명리 이거 정사건립, 회재(이언적)선생과 도의교우로 학문에 심취, 1535년 별시문과 장원, 승문원 교리 겸 경연춘추관기사관, 중국사신(3회),경산현령, 초계군수, 청백리 녹선, 1543년 호명낙향, 39세로 별세, 묘소는 쌍분으로 북군 화개산(사목정-음10월15일 시향), 슬하에 5형제가 의병 창궐하여 장자 휘 홍검은 호가 모헌이고 충순위로 곽재우 창의록에 록하고, 차자 휘 홍정은 무과급제하고 호가 만호로 창의록에 록하고, 3자 휘 홍각은 호가동강이고, 진사와 찰방으로 창의록에 록하고, 4자 휘 홍로는 인의로 화왕산 의병, 계자 휘 홍순은 호가 동우로 창의입훈, 상서원직장으로 병조참의로 증직되셨다.
북산서사는 호계공 25세때 남중리서 호명리로 이거하여 정사를 건립, 학문에 전념하였고, 북산사(北山祠)는 1823년 북군동 묘소에 창건, 훼철되었다가 1967년 이건하여 묘호를 지경(持敬), 당호는 포요(抱瑤)로 심덕재를 갖추고 3월 초정일(음력)에 후손과 향인들이 제향하고 있다.
예로부터 인재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주. 중종때 경주에서 태어난 호계공 을규는 사신으로 중국황제를 알면하매, 황제가 그 학문에 감동하여 쇠화로를 하사 하였다.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과는 도의로 맺어진 벗으로서 호계공이 과거응시 차 상경할 때 회재선생이 지었다는 시 한 수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경산현령과 호계군수로 있을 때 청렴하고 공명정대한 일처리로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으니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에 녹선 하였다.
나. 사정공 이눌
다. 감찰공 이자
12. 월성공 이지수
월성공파 파조인 지수 역시 묘소 실전으로 충남 논산군 연산읍 어은리에 사단을 모셨다. 행장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력을 살필 수 없으나 고려조 상서좌복야와 월성군의 봉호수를 제수 받았다.
아우인 지연의 후손은 원주이씨로 분적 하였고 월성군의 장남인 정렬공 규, 원나라에 억류된 충숙왕의 화를 면케 한 공로롤 이등공신의 첨의평리에 오른 차남 진의 후손들이 월성군파의 맥을 이었다.
소판공의 9세 차손 되는 문하시랑 춘림의 9세손에 와서 양오 직장공파, 존오 석탄공파, 존사 교감공파로 나뉘었다.
가. 직장공 이양오
직장공파의 파조되는 양오는 도적의 화를 입어 청운의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충효사, 이곳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했든 참선비 효사제 탁영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효사제 이탁영 효사제는 직장공의 입후 오세손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관찰사 찬획으로 있으면서 매일의 전황을 낱낱이 기록한 정만록의 저자로 유명하다.
나. 석탄공 이존오
석탄공파 파조 존오 선생은 높은 학덕과 직간충신으로 만세에 추앙 받는 대 명현이다. 원래 강직한 성품에 도의 신념이 굳건했던 석탄선생은 공민왕의 총애를 입고 방자하게 국권을 농락하는 신돈을 탄핵하는데 승소하여 앞장섰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다가 풀려 공주 석탄에서 우거하던 중 나라를 걱정하던 중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이 병이 되어 마침내 경륜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다. 교감공파
교감공파는 파조 존사의 증손 되는 수의부위 윤흥공이 연산군 학정에 실망하여 철동, 석동, 말동 세 아들과 더불어 경주로 낙향해서 경주, 영일 일대에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다.
(1) 도원공 이말동
도원공 말동은 영일 기계로 입 향하여 이곳이 곧 무릉도원이라 하고 도원정사를 지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연구와 후진지도에 평생을 바쳤다 고려중엽에서 말엽에 걸쳐 가문의 중추를 형성한 문중사는 이후 대소 수백 계파로 분파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시조 탄강지인 경주를 비롯하여 전국에 거주하는 경주 이씨는 85년 말까지 1백20여만 명으로, 95년 현재 2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 익재 이제현
명문에는 그 명성에 걸 맞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구강서원에 주벽으로 모신 익재 이제현 선생은 고려말 충선왕 에서부터 공민왕까지 여섯 왕을 섬기며 학자이자 정치가요 문장가로 추앙 받았던 대 명현이다. 공민왕조는 네 번이나 제상에 올라 많은 치적을 남겼다.
고려사 명신 록에 따르면 익재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척자인 백이정의 문인으로 열다섯에 성균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충선왕이 연경에 만권당을 세우고 특별히 선생을 불러 학문을 연구토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원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고려에 새로이 전래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문학에서는 고려 문학을 한차원 높이 끌어 올렸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구한말 한문학의 대가인 김택영 선생의 시를 일러 공교정준하고 만상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대가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충성심이다.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력하여 내정간섭이 극심하던 때로 원에의해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잇달아 양위당하고 충선왕이 원으로 소환, 유배되자, 선생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원나라 조정에 간곡한 상소를 올려 왕을 석방토록 하였으며, 공민왕 즉위 후에는 섭정승에 올라 몽고풍 일소, 내정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의 폐지, 부원세력의 숙청등 자주성 회복과 부국강병을 위한 대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이 16년 하세하니, 시호를 문충이라 하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라. 석탄공 이존오
난세에 충신이 난다고 했던가? 정국이 혼미했던 공민왕 말기, 국권을 잡은 신돈이 오만과 실정으로 나라를 그르치고 있었으니, 조정대신 모두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탄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석탄 존오 선생은 26세 정언의 신분으로 분연히 붓을 들어 척돈 상소를 올리고 어전에서 왕과 나란히 앉아 있는 신돈의 불손함을 호령하여 내려앉게 했던 직간충신이다. 선생은 이 상소로 왕의 진노를 받아 장사감무로 좌천 , 유배되었다가 풀려 공주 석탄에 우거하였다. 이때 신돈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니 나라걱정이 병이 되어 우국의 한을 품은 채 신돈이 망해야 내가 죽는다고 외치며 별세하시니 학문과 경륜을 펴보지 못한 아까운 나이 서른하나! 고려사를 읽던 조선조 숙종대왕은 석탄사적을 보고 감동하여 공의 늠연한 충절을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빛났으며 그 높은 명망은 반 천년간에 뉘라서 당할 손가라고 찬탄하였다. 석탄선생 별세 석달만에 신돈이 반역으로 처형당하자 공민왕은 늦게나마 선생의 충절에 감동하여 판삼사 대사성을 증직하고 열살된 아들 래를 불러 직장벼슬을 내렸다. 조선 인조조에 충신 정문이 내렸고 네곳 사원에 배향 되었다.
(1) 경절공 이래
석탄선생의 아들인 경절공은 어린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사려깊고 굳건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문장이 출중하였다. 우왕 구년 문과에 급제, 간의대부로 출사하였다. 그러나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옛말처럼 경절공 역시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의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풀린 후에 공주 석탄에 우거하며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경절공이 관직에 복귀한 것은 조선개국 후 옛 친구 정안대군 방원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 간의 알력이 심할 때였다. 이때 정안대군을 없애려는 반란을 눈치 채고 이를 미리 평정케 한 분이 바로 경절공 이래다. 태종이 즉위하자, 경절공은 세자사부,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전력하였다. 공이 사헌으로 있을 때 살인한 왕족을 사면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그 부당함을 직접 간언하여 의법처리 함으로써 개국초기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 잡았다. 태종 16년 55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애관을 보내 예장치제케하고 영의정의 증직과 개성부원군을 추봉하였다. 또한 종묘배향과 더불어 불천지위의 특전을 내려 종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성종조,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할 때 백성들을 이주시켜 국경을 안정시킨 사민의 공이 있었고 나라의 중대사마다 탁월한 경륜을 발휘하여 신망이 두터웠던 성종조의 충신이다.
좌리공신과 월성군을 봉하고 의금부오위도총부도총관과 형조, 호조의 판서, 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두 번 한성판윤이 되고, 재차 대사헌을 지내 문무를 겸비하고 국사에 밝았다. 연산군 2년에 별세하니, 나라에서는 시호를 양평이라 하고 불천지위를 명하였다.
(3) 세촌공 이문좌
세촌공 문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다. 성종조에 문과에 장원급제, 조정의 촉망을 받아 서장관으로 어서를 받들고 중국에 다녀왔으며, 사헌부 대간의 물망에까지 올랐으나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안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세촌공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맡은 바 직무에 정성을 다했으니 안협현감으로 재직시 고을에 흉년이 들자 세금을 면제하고 관아의 곡식을 풀어 천재지변에서 백성을 구하였다.
(4) 천휴당 이몽규
천휴당 몽규선생은 충남 보령 땅에서 은거할 때 서실에 천휴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천휴당이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은 말을 배울 무렵에 벌써 책을 읽었고 여나무살에는 대의를 깨우칠 정도로 명석했으니 천휴당선생의 스승은 제자의 재주에 탄복하여 후일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될 것이라 하였다.
본디 정신이 고상하고 부귀와 영달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집안에는 선생을 흠모하여 찾아드는 명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세 후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5) 창평공 이공린
평안관찰사 윤인의 아들인 창평공 공린은 장인인 박팽년의 죄에 연루되어 삼십년간이나 출사치 못하다가 공의 어머니 남양홍씨가 절부로 장려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환로에 올라 창평현감을 지냈다. 창평공은 팔별집의 일화로 더욱 유명한데 신혼 첫날밤, 꿈에 한 노인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아침상에 쓰려던 자라 여덟 마리를 방생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들이 모두 헌달하여 팔별 집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재사당 원은 사화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재사당 이원
창평공의 셋째 아들인 제사당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9세 어린나이로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에 올랐다. 연산조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들이 화를 입을 때 재사당 역시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6년 뒤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처남 최명남이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모시니 경기도 양주군 회전면 덕계리에 있는 지금의 묘소이다. 당시 공의 나이 서른 넷, 충절이 지조를 지키다가 아까운 나이에 참화를 당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의 무오, 갑자사화에 이어 중종조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훈구파에게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 이때 성균관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 뜰로 나가 조광조의 무고함을 극간했던 이가 모산공 해이다. 본시 영달에는 욕심이 없어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나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초개처럼 여겼던 것이다.
(6) 용재공 이종준
경북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에 위치한 경광서원, 이곳에는 높은 학덕과 절개로 안동유림의 추앙을 받는 용재공 종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재공은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대의 명유인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교우가 되었다.
홍문관직제학을 지냈던 공이 시와 글씨는 당대 으뜸이라 중국 사람들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가 화근이라 했던가?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유배 가는 도중,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담아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이 시가 나라를 비방하고 임금을 원망한다는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종반정 후 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이 신원되었으나 복관되지 않다가 용재공의 절개를 추앙한 안동 선비들이 조정에 주청하여 숙종조에 마침내 신원되었고 부제학을 증직 받았다.
백사 이항복
사화와 당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선조조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사상 초유의 국난을 맞아 경주이씨 충절의 전통은 국난극복의 민족혼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임지왜란 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병조판서로서 비상시의 대 국방 책무를 맡았던 백사 이항복선생, 백사선생은 뛰어난 지모와 불굴의 의지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국운을 구한 조선조 4대 명신 중의 한 분이다.
왜란당시 도승지였던 백사선생은 탁월한 지혜로 숱한 위기를 넘기며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하고 근왕병을 모집하여 전란 평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왜란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고 전란 후에는 영의정으로 질서회복과 민심수습에 전력했던 선생은 광해군조 인목대비 폐모 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서거하였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온 나라가 혼미하던 시대를 살면서 전시에는 충신이요. 전란 후에는 당쟁의 조정에 힘썼던 명신 이었으며, 청백리였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완벽한 선비의 전형이었으니 선생이 빛나는 삶과 지조 있는 죽음을 후학들의 사표로 영원히 추앙 받고 있다.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백사선생의 선영, 이곳에는 평생 벼슬을 멀리했으나 학덕으로 추천되어 좌찬성에 증직되었던 선생의 조부 예신, 춘방보덕 편수관 평안부사를 거쳐 직제학에 추증되었던 백부 봉윤. 그리고 부친 정헌공 몽양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정헌공은 진천수령으로 있을 때 상전을 모략하는 종을 엄벌하여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던 명관이었다. 정헌공의 삼남인 송복은 병자호란 때 왜군에 굴하지 않고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백사선생의 사남으로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던 기남과 선생의 뒤를 이어 가문의 이름을 빛냈다.
*.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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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族의 연원
시조는 이알평(李謁平).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상계(上系)편에 보면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나 왕이 된 뒤 아찬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유리왕 9년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법흥왕 23년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를 실전(失傳),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본관지 연혁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慶州)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조에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최(崔)ㆍ김(金)ㆍ노(盧)ㆍ이(李)ㆍ박(朴)ㆍ배(裵)ㆍ설(薛)ㆍ손(孫)ㆍ온(溫)ㆍ윤(尹)ㆍ전(全)ㆍ정(鄭)ㆍ풍(馮)씨 등이 있었다.
씨족史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본관(本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협천 이씨(陜川 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 이씨(車城 李氏)가 갈라졌다.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 이씨(平昌 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 이씨(加平 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 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 이씨(載寧 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 李氏)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 이씨(晉州 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 이씨(原州 李氏)로 갈려 나갔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의 조상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 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인 이규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15세조인 이강(李康+羽 )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조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8별(鼈)집>,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조선조에 상서공후 <백사(白沙)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후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에는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이 소판(蘇判)이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진골(眞骨)만이 할 수 있는 관등(官等)ㆍ관직(官職)이었다.
3세조인 이금서(李金書)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하는데, 4세조, 5세조는 각각 병정(兵正)ㆍ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냈다 한다.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正朝)는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4세조, 5세조가 경주(慶州)나 혹은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향리출신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6세조 이주복(李周復)이후는 중앙관직을 띤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12세조 이선용(李宣用), 13세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에는 고려 향직(鄕職)인 군윤(軍尹)ㆍ보윤(甫尹)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진(李瑱)은 충렬왕 6년(1280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제 2등으로 뽑히고 동생 이세기(李世基)는 제 3등으로 천장급제(天場及第)라 불렀다. 문한학사, 시독학사, 밀직승지(密直承旨)등을 역임하시고 안향(安珦)이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 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여 주자학을 가르쳤다 이후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치고 , 충선왕이 즉위한 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 원년 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 都監使)로 성균관에서 성리학 보급에 전력을 다하여 여러 문생을 키워냈으며 충숙왕 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박충좌(朴忠佐) 등을 뽑았다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이세기(李世基)는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1367년)이다. 그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頤正)에게서 배웠다.
충렬왕 신축년(1301년)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때 지공거 국재공 권부(權溥)가 사위로 맞이하였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조맹부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자 원(元)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외에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이 있다. 그가 만권당(萬卷堂)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중국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계성흡사문전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충선왕이 읊자 중국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이제현(李齊賢)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 나라(고려)의 시에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미두초일금계창(尾頭初日金鷄唱) 흡사수양요요장)”繭遮?글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가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의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부운유서무근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동인시화(東人詩話))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元)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익재공의 스승인 백이정(주자학 도입)의 사위가 됐다 충숙왕 때 18세로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다가 장림역에서 28세로 요절하였다 아, 이에 앞서 군이 태부인(太夫人)의 상을 당했을 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종족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 뒤에 학업에 종사하여 글을 잘하고 일에 종사하여 재간을 보이자, 그가 가업을 제대로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수명을 더 빌려 주지 않고 이렇게 했단 말인가. 아, 슬픈 일이다.
국당(菊堂) 이천(李蒨)은 충렬왕 25년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밀직사사(密直司事)ㆍ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고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고려조 인물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칭ㆍ이치연(李侈連)ㆍ이총섬(李寵暹)과 이핵(李翮)(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이강(李康+羽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ㆍ이인정(李仁挺)(문하평리(門下評理))ㆍ이보림(李寶林)(정당문학(政堂文學))ㆍ이존오(李存吾)(우정언(右正言))ㆍ이달충(李達衷)(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이 두드러져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는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한(史翰)에 발탁,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王)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변호로 극형(極刑)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뒤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었다.
이달충(李達衷)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좨주(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ㆍ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했다. 1359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王)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에게 주색(酒色)을 삼가라고 공석(公席)에서 직언(直言)하다가 파면, 1371년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95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조선초기에 현직에 오른 이래(李來)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로 죽은 후 이어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록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우왕 9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 간관(諫官)에 등용,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파인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주살(誅殺)을 건의했으며,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 곧 풀려나 공주(公州)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정종 1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도고 이듬해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 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평정,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발탁되고,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2등(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1408년 지의정부사겸판경승부사(知議政府事兼判敬承府事))에 이르렀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백 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조선조에서 이씨(李氏)들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유명한 <8별집>은 이익재(李益齋)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되는 이공린(李公麟)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장가든 첫날 방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李公麟)은 박(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鼇)ㆍ구(龜)ㆍ원(黿)ㆍ타(鼉)ㆍ별(鼈)ㆍ벽(鯁)ㆍ경(鯨)ㆍ곤(鯤)이라고 거북 구(龜) 아니면 고기 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원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 죽음으로써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온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장인인 박팽년(朴彭年)이 죽은 후 그 죄에 연좌되어 30여년을 금고당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을 받음으로써 그 자식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성종 13년 무과를 거쳐 현령(縣令)이 외었으나 셋째아들 원(黿)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죽자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고 청주(淸州)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이구(李龜)는 성종 23년 문과에 급제,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동생 원(黿)의 화(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이원(黿)은 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연산군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봉상사(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주자고 건의(建議)한 일로 곽산(郭山)에 장류(杖流), 4년 후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사균(李思鈞)은 중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재직하던 중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몽량(李夢亮)은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3등(衛社功臣三等)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ㆍ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557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559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 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1562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후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전력한 그는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선조 1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158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평난공신3등(平難功臣三等)이 되었다. 도승지(都承旨)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왕(王)을 호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선조 31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우의정(右議政)으로 전임,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다.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2년 뒤 호성공신1등(扈聖功臣一等)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죽은 그 해에 바로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영조 때의 좌의정(左議政) 이태좌(李台佐), 소론(少論)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모두 백사(白沙)의 후손이다. 이광좌(李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 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이광좌(李光佐)의 8촌 형인 이태좌(李台佐) 또한 소론(少論)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러쓴ㄴ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 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群山)을 삭평턴들 동정호(洞定湖)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 수가 <뜻을 두고도 못 이룬> 한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 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국당공(菊堂公) 이천은 아들이 4형제(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였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원종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ㆍ이정형(李廷馨)(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장헌세자(莊獻世子))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 등 저술을 남겼다.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지목되는 이벽(李檗)이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상면(江上面) 앵자봉(鶯子峰)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ㆍ정약용(丁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등 10여 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무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서교(西敎)(천주교(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명동(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당시 사학(邪學)으로 배척되던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이들응 사회적으로 큰 제재를 받게됐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 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셀患?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근세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인물로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李相卨)과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있다. 이상설(李相卨)은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자결(自決)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ㆍ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시영(李始榮)은 백사(白沙)의 11세손이며 이종성(李宗城)의 5대손으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겸법무위원(國務委員兼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알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ㆍ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근년 작고한 애산(愛山) 이인(李仁)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제(日帝)하 변호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한글학회)사건 때는 회원으로 그 자신이 붙들려 가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헌국회의원, 대법원장 직무대리, 검찰총장, 법무부장환, 반민특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다. 60년 참의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애산(愛山)은 몇 해 전 돌아가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따. 애산(愛山)과 함께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이 근년까지 <유일한 생존자>로 독립운동의 표상이 되어오다 81년 돌아갔다.
정묘보(丁卯譜)’에 보면,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 것으로 미루어 상계(上系)가 일찍이 고려가 건국할 무렵에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그러다가 17세 이규의 자손들은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남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뒤에 일부가 그 곳에 자리 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대체로 23세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경기도 안성(安城), 경북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ㆍ경주(慶州),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17세 이관(李琯)의 자손들은 21세 이인로(李仁老)가 단종손위(端宗遜位) 때에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살았던 이후에 임실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에서 18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가 21세 이지회(李之會)ㆍ이지대(李之帶)의 대에 경산(慶山)의 자인(慈仁)과 경주(慶州)에, 23세 이성지(李成枝)의 대에 제천(堤川)에 각각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18세 이달존(李達尊)의 후계(後系)는 20세 이미(李美)가 태종조에 제주(濟州)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제주(濟州)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해서 안성(安城)의 죽산(竹山)ㆍ완주(完州)의 고산(高山)ㆍ청원(淸原)ㆍ영일(迎日)의 흥해(興海)ㆍ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에 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의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는 21세 이문(李聞)이 경북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세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남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17세 이천의 자손들이 22세 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ㆍ철산(鐵山)에, 23세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ㆍ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보이며,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 이경원(李敬元) 이애로 4대에 걸쳐 용인(龍仁)ㆍ봉산(鳳山)ㆍ상주(尙州) 등지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17세 이과의 자손들은 안동(安東)ㆍ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이수가 여말(麗末)에 평북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았던 이 후에 곽산에 세거했던 것 같다. 15세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20세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경주(慶州)에 살았으며, 17세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세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의성(義城)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1930년 당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북 청원군(淸原郡)일원, 충남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북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남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 경북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 경남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북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남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 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잡은 것이 450여년 전, 이제현(李齊賢)의 9대 손인 이반기(李磻琦)가 정미사화(丁未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