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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망각 예찬

최두호 2017. 11. 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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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예찬 몇 년 전 초봄이었다. 고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자동차 접촉사고를 당하고 가해자로 몰려 터무니없이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던 때가 있었다. 인근 아파트 단지에 차를 주차하고 볼일을 보고는 주차장에 돌아와서 차를 후진하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난데없이 차 한 대가 엇비슷하게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후진할 때 뒤에는 차가 없었었다. 내 차 범퍼에는 상대방 차색이 스치듯 묻어 있었고 상대방 차는 운전석 앞 범퍼 코너에 한 뼘 정도의 흠이 나 있었다. 도색료만 주면 합의될 일이었지만 2 ,30대로 보이는 두 젊은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보험회사에 득달같이 신고를 하고 보험회사 차가 휑하니 날아왔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주차장에서 추위에 떨어 감기가 들었다고 하면서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 보아야겠다고 하기에, 기가 막혀 동의하지 않았더니 재판을 하겠다는 경고장까지 날아들었다. 화가 난 나는 접촉사고를 일부러 낸 것 같고 가당찮은 대인사고로 몰아가므로 재판에 응하여 사고의 고의성과 부당성을 법적으로 증명하겠다고 내 쪽 보험회사 측에 뜻을 비쳤다. 그러나 가해자가 이긴 전례는 없다며 오히려 참는 것이 유리하다는 충고만 돌아왔다. 그 후 피해자는 한의원에서 진료는 물론이고 보약까지 처방받고 대인보상액까지 타내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 탔다고 두 사람 몫을 말이다. 그 뒤 우연히 텔레비전 뉴스에서 고의로 접촉사고를 내고 돈을 뜯어내는 전문 보험사기단이 있다는 내용을 접하고 사고 당시 억울했던 점과 잘못된 사회 관행을 바로잡아 보지 못하고 승복해 버린 자신의 무력감에도 화를 억누르지 못하였다. 이러구러 시간이 흘렸다. 어느 날 운전 중에 나는 깜짝 놀랐다. “ 나쁜 년…….” 나도 모르게 신음하다시피 내 입에서 욕이 흘려 나왔다. 잊고 싶었고, 잊으려고 노력했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후 나는 마음속에 각인되었던 분노가 심성을 거칠게 만들 뿐이고 심신 수양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중국에는 옛 고사에서 비롯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춘추 전국시대, 오나라 왕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가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죽으면서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부러 가시가 있는 섶 위에서 자면서 그 고통으로 유언을 되새겼다. 그 후 있은 전쟁에서 월나라 구천을 항복시키고 그 아내를 첩으로까지 삼았다.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에서 3년 동안 온갖 고역과 모욕을 견디고 겨우 목숨을 건져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 날마다 문 앞에 매달아 놓은 쓰디쓴 곰쓸개를 씹으며 모욕을 되새겼다. 그 후 있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부차를 자결하도록 만들어 기어이 복수하고야 만다. 일찍이 독일의 학자 에빙하우스(Ebbinhaus)는 망각곡선이라는 학습이론을 내놓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이 망각되는 것을 곡선화한 것이다. 무언가를 학습한 후에는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고, 1시간 뒤에는 50%, 하루 뒤에는 70%, 한 달 뒤에는 80%를 잊어버리게 되며 그 후에는 약20%만이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각을 방지하려면 반복학습으로 기억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옛날의 부차와 구천은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의 서양학자의 이론을 철저하게 활용한 셈이 된다. 그들은 애써 기억을 하려고, 아니 망각을 하지 않으려고 망각방지제로 가시섶과 곰쓸개를 사용하였다. 부차와 구천의 복수 의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달성한 그들의 목적도 넉넉히 이해가 가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울분과 분노를 일으키는 기억을 물리치고 애써 망각을 오히려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 같은 범부의 일상생활에서 매일매일 쟁투 의지를 다지기 위하여 기억의 칼날을 갈아야 하는 일이 생겨서야 되겠는가? 또한 좋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억들을 매일 새록새록 떠올리고 곱씹으면서 마음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삶의 자세도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망각은 용서와 화해의 몸짓이다. 나에게 흙탕물을 튀겼거나 생채기나 흠집을 내었던 사람들이나 사건, 사고의 기억을 비워내고, 나 자신에게도 충실하지 못했거나 자기답지 못했던 행실들의 기억을 너그러이 비워내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분쟁이나 다툼의 기억까지도 너그러이 비워내는 것이다. 그래서 망각은 기도의 몸짓이 된다. 더 나은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추스르는 자기 연찬의 기도가 된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 . 머리칼이 점점 허예져가는 요즈음, 망각의 늪은 점점 넓어진다. 기억의 창문은 점점 닫혀만 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 때 무지개처럼 찬란했던 꿈과 이상, 핑크빛 사랑의 순간들, 땀과 피로 얼룩진 힘겨운 몸짓, 그리하여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희로애락의 사연들은 기억의 창고에서 숨 쉬고 있다. 그것들은 이제 노을 지는 인생의 황혼기에서 가끔이면 회고와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강물처럼 펼쳐져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추억하고 싶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았던, 유쾌하지 않았던, 행복하지 않았던 삶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추억하고 싶지 않은 불청객들이 기억의 창고에서 똬리를 단단히 틀고 않아 있다가 가끔 불쑥 뇌리에 떠오를 때면 다시금 낭패감과 자괴지심에 불쾌해진다. 오! 아름답게 채색된 삶의 사연만을 컴퓨터의 저장 기능처럼 영원히 저장하여 그것을 추억하며 산다면, 삶이 얼마나 황홀하고 즐거울 것일까? 아! 꺼림칙하고 칙칙하고 어두웠던 사연들을 컴퓨터의 삭제 기능처럼 미련 없이 지우고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무척이나 가쁜하고 환한 마음으로 살아 갈 수가 있을 터인데……. 몇 달 전에 시댁 친척 되시는 분이 돌아가셨다. 납골당에서 뼛가루를 담은 유골함이 석함에 안치되는 것을 바라보던 유족 한 분이 혼잣말로 탄식하였다. “ 겨우 저 속에 들어갈 걸 그동안 아등바등 그러고 살았나.” 한 순간 마음을 크게 내면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다 거두어 질 것을, 숨을 쉬고 있을 때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기를 쓰며 흑백을 따지고, 2원론적 사고로 침까지 튀겨가며 갑론을박하던 삶의 나날들이, 숨을 탁 놓게 되면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삶은 화산이다. 불덩어리 같은 정열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푸른 날의 활동, 그런 역동적인 시절이 다 가고, 서서히 가라앉는 검은 휴화산이 멀지 않아 시허연 사화산으로 남는 것이다. 라 브류이에르는 말했다. “인생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며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느낌과 생각에 따라 인생의 의미는 달라진다는 뜻이리라. 자, 인생을 희극으로 느끼기 위해서 망각을 부르자. 그리고 인생을 비극으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도 망각을 부르자. =수필가/ 김경남 님 글"土壁(토벽)(8호) 중에서..."=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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