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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1

최두호 2017. 11. 21. 12:39

 

             오대산 월정사 (月精寺)

     * 있는 곳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 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자장이 창건할 당시에는 초암(草庵)으로 엮어 만든 임시암자에 불과했지만,

   그뒤 신효(信孝)·신의(信義)·유연(有緣)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면서 점차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버렸으나 이일(而一)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데,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되어 이 절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뒤 1964년에 탄허(呑虛)가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만화(萬和)가 계속 중건하여,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용금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과 그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세조가 친필로 쓴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월정사의 보물 및 유물을 모아 놓은 보장각에는 소형 목조탑을 비롯하여 경전·인도불상·불화 등이 소장되어 있다.  <펌>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오대산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에 각각 관음암· 수정암· 지장암· 미륵암· 사자암 등 암자가 있는데,

   이 암자들은 월정사(月精寺)의 부속암자이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보살 -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펌>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平昌 月精寺 石造菩薩坐像) - 보물 139호 (1963.01.21.지정)

     * 있는 곳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월정사 경내의 8각 9층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높이 1.8m의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고, 목에는 아주 뚜렷한 3줄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하였다.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동자상의 머리에 팔꿈치를 올려 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석조 보살좌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같은 형식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와 신복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펌>

 

 

                         박강현 회원 촬영

 

 

 

 

 

 

 

 

 

 

 

    월정사 연혁

연      대

내                                  용

  643년

   (선덕여왕12)

  자장율사 월정사 창건

  통일신라

  신효(信孝), 신의(信義) 스님이 차례로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렀으며
  그 후 유연(有緣)스님이 다시 암자를 지음

  705년(선덕왕4)

  보천(寶川)과 효명태자가 진여원(상원사) 창건

  1307년

    (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而一)스님이 중창

  1376년(우왕2)

  영로암(英露庵) 스님이 상원사 중건

  1392년(태조1)

  서대 수정암 전소

  1392년(태조2)

  석나암, 조계운 등이 우통수 옆에 수정암 중건

  1401년(태종1)

  태종이 권근에게 명하여 상원사 중창,

  아울러 운설악이라는 노스님이 폐허로 남아있던 사자암 중건

  1465년(세조10)

  세조의 발원으로 신미스님 등이 상원사 중창

  1606년(선조39)

  오대산 사고를 중대 남쪽 효령봉 아래 세우고 월정사에서 수호하도록 함

  1833년

    (순조 33)

  화재로 전소. 순조가 공명첩 4백장을 내려 주어

  법당, 어실각, 대루각, 요사채를 중건하고 모두 복원함

  1844년

    (헌종 10)

  영담, 정암스님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대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함

  1902년(고종 6)

  운암대준스님의 부탁을 받아 만화관준.

  낭응경왕스님이 기존의 사적에 내용을 추가하여
 『오대산사적』을 새로이 편찬

  1911년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해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관할

  1947년

  월정사 주지 이종욱스님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 따

  정면8칸 측면4칸의 ㄱ자형 집을 건립

  1950년

  한국전쟁으로 칠불보전,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의 건물이

   모두 불에 탐

  1958년

  영해당 경덕스님이 조사당을 중건함

  1969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함

  1971년

  관음암을 중건함

  1973년

  만화희찬스님 맞배지붕 형식의 방산굴 건립

  1974년

  만화 희찬스님 천왕문 중건. 월정사의 성보를 보관할 보장각 건립(18평 규모)

  1975년

  정면5칸 측면2칸 맞배지붕 형태의 진영당

   1975년 만화스님이 중건하고 94년 현해스님 증축

  1976년

  정면11칸 측면3칸 팔작지붕의 서당(대강당) 만화스님이 중건

  1977년

  정면7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용금루 1977년 만화스님 중건한 건물을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김

  1978년

  만화스님이 해행당 중건

  1979년

  만화희찬스님 ㅁ자형의 설선당(동당) 중건

  1980년

  자장율사의 진영을 조성하여 조사당에 봉안

  1986년

  도명스님이 심검당을 중건

  1992년

  현해스님이 수광전을 중건

  1994년

  현해스님이 삼성각을 중건하고 진영당을 증축함
  종고루 1994년 현해스님 보수

  1999년

  보장각을 신축하고 금강루 호지각을 준공함
  금강루 정면3칸 측면2칸 2층누각으로

   1997년 현해스님이 착공하여 1999년 10월에 낙성
  보장각-1996년11월 착공하여 1999년 10월 개관

  2004년

  대법륜전 완공

  2008년

  석조보살좌상 복제품 제작 봉안(이재순 석장)
  정념스님이 만월선원 개원

  2009년

  정념스님이 성적당 및 향적당 신축
  정념스님이 진영각 증축

    (진영당 건물을 개산조각으로 변경 이전하고, 2009년 진영각은 증축)
  정념스님이 만월교 개통

 

 

 

              월정사를 끝으로 강원도 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오대산 상원사

   * 있는 곳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다는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인데

  그곳에서 자장율사가 유학했고 귀국하여 이 산의 형세를 보고 중국의 오대산과 너무나 흡사하여

  이름을 오대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오대산은 이후 이른바 “문수보살”의 오대신앙 본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상원사는 주 법당을 “문수전”으로 하여 문수보살을 모셨다.  <펌>

 

   ++ 백과사전 ++

  이 절은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長嶺山)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麒麟山)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象王山)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地盧山)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

  그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平昌上院寺重創勸善文〉(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월정사 소재)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1904년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고,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펌>

 

                관대걸이

 

 

 

 

 

 

 

 

                   거울에 비친 천장벽화

              거울에 비친 천장벽화

 

                문수전

     상원사 주련(柱聯) 내용

  佛身 普邊 諸大會(불신 보변 제대회) - 부처님의 몸은 모든 곳에 두루 계시고

  充滿 法界 無窮盡 (충만 법계 무궁진) - 법계에 충만하사 다함이 없으시며

  寂滅 無性 不可取(적멸 무성 불가취) - 적멸하여 본성이 없어 취할 수 없건마는

  爲求 世間 而出現 (위구 세간 이출현) -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 하셨네

  如來 功德 不思議 (여래 공덕 부사의) - 여래의 공덕은 불가사의 하시며

  衆生 見者 煩惱滅 (중생 견자 번뇌멸) - 중생들 보는 자는 번뇌가 다 사라지네.

  祖印恒作七佛師 (조인항작칠불사) - 조사의 심인으로 칠불의 스승이 되시더니

  大智亦爲菩薩首 (대지역위보살수) - 큰 지혜로 또한 보살 가운데 으뜸이네.

  刹刹現身示無身 (찰찰현신시무신) - 온 세상에 몸을 나투되 몸 없는 몸을 보여

  普令衆生超三有 (보령중생초삼유) - 중생으로 하여금 삼계를 벗어나게 하셨네.          <펌>

 

 

                 고양이 석상

 

   고양이 석상에 담겨 있는 "세조와 고양이 이야기"

   온몸에 종기를 치료한 세조는 이듬해 상원사를 방문 하였다.

   세조가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리는 순간

   어디선가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세조가 즉시 군사를 풀어 법당을 뒤지게 하였고 불상 밑에 숨어 있던 자객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고양이를 찾았지만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세조는 고양이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논 500섬 지기를 내리면서 고양이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부터 묘답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절에 바치는 쌀을 고양미라 불렀고

   고양미가 공양미로 변하여 지금도 부처님 전에 올리는 쌀을 공양미라고 한다.   <펌>

 

 

 

 

   상원사 문수전의 문수보살과 문수동자

 

 

   문수전의 문수보살(문수동자상)은

   세조가 계곡 물에 몸을 씻을 때 등을 밀어주어 등창을 낮게 해준 동자 모습의 문수보살의 현신을

   세조가 기억한 대로 조각했다고 하며

   이 문수동자상(국보 32호)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국내 유일의 동자상으로서 천진스러움이 잘 나타나 있다.

 

   높이 98cm의 이 문수동자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세조12년)에 만들어 모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형상은 “징관대사”의 “화엄경소”에

     “문수는 머리에 5불관(五佛冠)을 썼는데 정수리에는 5방으로 상투를 나누었다”고 한 상투 동자형이다.

   또한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

   어린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어느날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자신의 몸에 침을 밷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부터 침이 뱉은자리마다 종기가 돝았고 온몸으로 퍼져 고름이 나오고 병이 악화 되었다.

   명의와 신약이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부처님께기도를 올리고자 찾아간 곳이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맑은 계곡물 등 절경에 취해

   세조는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세조는 주위를 물린 채 혼자 목욕을 하였다.

   그때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만 동자승이 눈에 띄어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 하였다.

   동자승이 등을 밀고나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하였다.

    "꼬마야 어디 가서든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자 동자승이 대왕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 "말하지 마시요 하였고

   왕은 곧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았다는 얘기가 전해 진다.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한 세조는 환궁하여 화공을 불러 자기가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궁궐에 화공이 없었다.

   그러던중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그려 온 동자의 모습이 너무나 똑 같아 세조가 놀라서 오신 곳을 묻자

   노스님은 영산화상에서 왔다고 하고 골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문수보살의 두번째 친견이었다.

   이후 의숙공주와 효령대군의 발원으로 문수동자상이 조성되어 1466년 봉안 되었다.  <펌>

 

박강현 회원 촬영

 

 

 

 

 

 

   청량선원이라는 이름은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는 데서 연유하며 스님들은 수행공간인 선방이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월, 운봉, 동산, 탄허, 서옹, 고암, 법룡 스님 등

   한국 선불교를 풍미했던 선지식들이 두루 거쳐간 곳으로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펌>

 

 

                 상원사 동종 - 보호막 속에 있습니다.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높이 167cm, 입지름 91cm, 상원사를 원당사찰로 만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가 좋은 종을 안치할 것을 명령 하였고

   수소문 하던 중 안동도호부 남문류에 걸려 있던 동종을 예종1년(1469) 상원사로 옮겨 왔다.

   성덕대왕 신종보다 100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100리 까지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한다.

 

   상원사로 동종을 옮겨 올려면 죽령을 넘어와야 하는데 종이 하도 무거워 가져 올 수가 없어

   생각다못해 종류한개를 띄어 안동도호부로 돌려 보내니 종이 가벼워져 상원사로 옮겨 올수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종류 36개중 한개가 없는 상태로 달려있다고 한다.         <펌>

 

 

 

  영산전

 

 

 

 

 

 

 

 

 

 

 

 

 

                  영산전 석탑

 

 

 

 

 

 

 

 

 

 

 

 

 

 

 

 

 

 

                 상원사 둘러보기 화보 입니다.

 

 

 

 

 

 

 

 

 

             상원사 입구 모습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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