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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행정보] [중국 역사기행] 오악(五岳)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동악, 태산

최두호 2017. 11. 21. 12:38
[중국 역사기행] 오악(五岳)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동악, 태산

 

중국에는 종교적인 성지(聖地)로 4대불교성산(四大佛教聖山)과 5대도교성산(五大道教聖山)이 있다. 4대불교성산은 지장보살을 모신 구화산(九华山), 보현보살을 모신 아미산(峨眉山), 문수보살을 모신 오대산(五台山), 그리고 관음보살을 모신 보타산(普陀山)이다.

 

그리고 5대도교성산은 산동성의 태산(泰山), 섬서성의 화산(華山), 하남성의 숭산(嵩山), 호남성의 형산(衡山) 산서성의 항산(恒山)을 일컬으며, 이는 별도로 중국의 동, 서, 남, 북, 그리고 중앙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명산이라고 하여 오악(동악 태산, 서악 화산, 중악 숭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이라고 불리며 신성시된다. 중국사람 중 일부는 이 9대 성산에 안휘성의 황산을 더해서 중국10대명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오악(五岳)을 다양한 형태로 묘사하기를 즐겨 했는데 그 예로 오악의 생긴 모습을 따라 태산여좌(泰山如坐, 앉아 있는 태산), 화산이립(華山而立, 서 있는 화산), 숭산여와(嵩山如臥, 누워 있는 숭산), 형산여비(衡山如飛, 날아가는 형산), 항산여행(恒山如行, 걸어가는 항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2년전 중국에 발을 첫 내 디디며 버킷 리스트((bucket list)로 무엇보다도 먼저 이 10대 명산을 꼽았었는데 올해 오악을 모두 방문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중국 10대명산 순례는 전문 산악인들이 꿈에 그리는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를 오르는 것만큼이나 영광되고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중국의 오악 분포도)


년 초 부산의 한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정교수님으로부터 교수님 몇 분과 함께 태산(泰山)을 가기로 했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무조건 좋다고 했다. 우리는 이번 여행계획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시(濟南市)에서 만나 태산을 오른 후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곡부(曲阜)를 들리는 것으로 짰다.


여행 첫날 오후 늦게 제남비행장에서 반가운 해후를 한 우리 일행은 일단 태안으로 가서 하루 저녁을 묵은 후 다음날 아침 일찍 태산을 오르기로 했다. 태산이 있는 태안시(泰安市)는 제남시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오악(五嶽)중에서도 으뜸이라는 태산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마치 꿈길을 걷는 것 같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태산으로 향했다. 겨울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평일에다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태산입구에는 차를 주차시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들이 몰려있다. 가까스로 차를 길가에 대고 우선 매표소로 갔다. 매표소에는 태산입구에 몰려 있는 차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중국의 명승고적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에는 정말 사람이 많다. 그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1년 365일 중국 전역의 명승고적지들을 꽉꽉 채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경이롭기까지 하다.

 

중국의 창세신화를 적은 양(梁)나라 임방(任昉, 460~508년)의 《술이기(述異記)》에 의하면, 세상을 창조한 반고(盘古)가 죽은 후 그 사체가 화생(化生)하여 머리와 사지는 오악(五岳)으로, 눈은 일월(日月), 기름(脂)은 바다, 피는 기름, 핏줄은 길, 머리카락은 초목이 되었다고 한다. 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숨은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고, 몸은 산이 되었으며, 뼈는 바위와 돌이 되었단다.


특히, 태산은 그의 머리가 변하여 된 것으로 탄생과 부활을 의미하므로 오악 중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서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도 불리는데, 1,545미터에 불과한 그리 크지 않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산봉 112개, 절벽 98곳, 동굴 18곳, 기이한 돌 58개, 계곡 102곳, 못과 폭포 56곳, 샘물 64곳, 식물종류 989가지가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산도 아주 풍부해서 고대건물 22곳, 고대 유적 97곳, 기념비석 819개, 석각 1800여곳이나 된다.

 

또한, 태산은 역사적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장소 중의 하나로 기원전 219년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秦始皇)이 태산의 정상에서 천제를 지내고 그의 제국 통일을 선언하는 유명한 비명(碑銘)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한무제, 광무제, 당태종, 송대의 진종, 청대의 강희, 건륭 등 역대의 황제들이 모두 태산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버스로 중천문(中天門)까지 온 다음에 케이블카를 타고 남천문(南天門)까지 간 후 걸어서 1시간이면 정상에 도달한다고 했지만, 태산에 올랐던 옛 시인묵객들의 정취를 느끼고, 또 태산의 묘미를 만끽한다는 취지에서 7,200여개의 돌계단을 밟고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태산을 오르는 길은 동쪽길과 서쪽길이 있었는데 우리는 동쪽길로 산에 올라 정상에 오른 후 중천문에 내려와 서쪽길로 산을 내려오기로 했다.


오전 내내 산을 오르자 저 멀리 남천문이 보인다. 이제 남천문까지는 지천, 하지만 우리 바로 앞에는 태산을 오르는데 가장 힘든 코스라는 십팔반(十八盤)이 기다리고 있다. 경사 50도에 1,633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졌다는 십팔반을 앞에 두고 더 이상 다리가 나가지를 않는다. 아, 나이를 탓하지 말고, 게으름을 탓하자.

 

 
(눈에 쌓인 십팔반)                                                          (천가에서)

 

십팔반을 간신히 올라 남천문을 통과하자 절벽을 가르는 하늘길이라는 천가(天街)가 나왔다. 천가에 서서 저멀리 까마득히 솟아 있는 태산의 정상 옥황정(玉皇頂)을 바라보며 두보의 심정으로 그의 시 ‘망악(望岳)’ 읊는다. 수많은 시인묵객들과 역대 황제들이 태산을 경모하여 수많은 글을 남겼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두보의 ‘망악(望岳)’을 제일 좋아한다.


대종부여하 (岱宗夫如何) 대종(태산)은 어떠한가
제노청미료 (齊魯靑未了) 제나라와 초나라로 이어져 끝없이 푸르구나
조화종신수 (造化鐘神秀) 천지에 신령함 여기에 다 모이고
음양할혼효 (陰陽割昏曉) 음지와 양지로 어둠과 밝음이 갈라지는구나
탕흉생층운 (湯胸生層雲) 가슴을 씻어내며 층계구름 솟아오르고
결구입귀조 (決□入歸鳥) 새들은 입 벌리고 둥지로 날아드는구나
회당능절정 (會當凌絶頂) 언젠가 꼭 정상에 올라
일람중산소 (一覽衆山小) 뭇 산이 작음을 한눈에 굽어보리라.

 

우리는 조선시대 문장가 양사언(1517-1584)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를 주고 받으며 열심히 산을 올라 오후 늦게 태산의 정상 옥황정(玉皇頂)에 도착했다. 정성에 올라 산아래를 굽어 보자 공자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작아 보인다: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

 

오름이 있으면 반드시 내림이 있는 것,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처음 산을 오를 때에는 종주를 하려고 했었는데 십팔반에서 너무 힘을 빼버렸는지 모두들 걸어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 표정이다. 우리 나이에는 무릅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슬그머니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태산의 절경)

 

땅거미가 내려 앉은 후에야 태산을 내려와 태안에서 하루 저녁을 더 묵은 뒤 공자의 고향이자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으로 유명한 곡부시(曲阜市) 로 향했다. 곡부는 태안에서 남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공자의 고향이 산동성 곡부(曲阜)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곡부에서 동쪽으로 160킬로미터에 제갈공명의 고향인 기남(沂南)이 있고, 또 곡부에서 서쪽으로 45킬로미터만 가면 맹자의 고향인 맹부(孟府)가 있다는 사실은 중국사람들 조차도 잘 모른다. 나는 수업시간 중에 학생들에게 자주 제갈량의 고향과 맹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대답하는 학생을 본적이 없다.

 

제갈공명 고향인 기남과 맹자의 고향인 맹부는 작년에 갔었기 때문에 이번 산동여행은 곡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마치기로 했다. 사료에 의하면 노나라 시대의 곡부성은 노나라의 건국공신이자 왕의 친동생인 주공 단(周公 旦)이 하사 받은 봉국지로 왕성에 버금가게 큰 규모였다고 한다.


우리는 곡부에 도착한 후 시중앙부를 지나서 남문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산 후 우선 공묘를 돌아 본 다음 공부를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북문에서 더 북쪽으로 있는 공림을 참관하기로 했다.


공묘(孔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없는 곳이 없다.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동네마다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이 있게 마련이고, 화교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그들이 정착한 곳마다 세웠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도 공묘는 있다. 그 중 우리나라 성균관의 대성전(大聖殿)이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것은 문묘제례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공묘 중에서 제일 유명하고 중요한 곳이 바로 이 곡부의 공묘라는 사실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공묘는 본래 공자가 살던 집이었다고 하는데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2년 뒤인 기원전 478년에 공자의 집을 사당으로 바꾸라고 명한 이후, 역대로 증축과 개보수를 거듭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청나라 옹정제 시대에 갖추어진 것이라고 했다.

 

공묘의 정문격인 성시문(聖時門)을 통과한 후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문문(同文門) 등 몇 개의 문을 지나자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을 지키고 있는 대성문(大成 門)이 나왔다. 대성문(大成門)이라는 이름은 공자께서 학문을 집대성(集大成)을 하신 분이기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성문을 들어서자 동쪽에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 회나무는 공자가 직접 심었다고 해서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라고 부른다고 한다. 2500여년을 한결같이 늠름히 서있는 회나무를 보고 있자 배움으로 하늘의 성품에 이르신(學達性天) 공자의 정신이 다가온다. 대성전으로 향하며 논어의 첫 구절을 읊조려 본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회나무)
 

역대 황제들이 황궁에 준하는 규모와 법도로 지으라고 명을 해서 10여만 제곱미터 부지 위에 수십여개의 대규모 건축군으로 이루어진 공묘의 본청인 대성전(大成殿)은 자금성처럼 황금기와로 덮여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공묘의 대성전)

 

공묘를 나와 공부로 갔다. 공부(孔府)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이 곡부를 다스리던 관청이자 거주지로 왕궁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했다. 공부는 집무공간과 가정집,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공자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연성공(衍聖公)의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연성공의 주요업무는 공자를 비롯한 조상을 받들고 제사 모시는 것과 전적을 보존하고 학문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공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큰 아들 공리(孔鯉)와 손자인 공급(孔伋) 이후로 끊어졌다가, 공자 사후 300여년이 지난 한나라 원제 때에 이르러서야 공자 13대손인 공패(孔覇)를 포성군(褒聖君)으로 삼아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는 기록이 다시 나온다. 한나라 때에 공자의 후손에게 작위를 내린 것을 보면 그 때 이미 유학이 국가의 통치철학으로 다른 제가의 사상들을 압도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후16대손인 공균(孔均) 때에 벼슬을 올려 포성후(褒聖侯)가 되었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한층 더 높아져서 문선공(文宣公)의 작위를 받았으며, 송대 이후에는 이 명칭이 다시 연성공으로 바뀌어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공부의 마지막 주인인 공령이(孔令貽)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갔고, 그의 아들인 공덕성(孔德成)이 대만대학의 중문과 교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조속한 시일 내에 공자의 후손들이 다시 공부로 돌아와서 공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공자가문의 가족묘지인 공림(孔林)으로 갔다.
공림(孔林)은 공자의 직계 후손들만 묻힐 수 있는 성역으로 끝없이 넓은 묘역 안에는 2만그루가 넘는 고목이 울창한 산림을 이루고 있었다. 한나라 이후 확장 보수를 거듭한 공림에는 3,600여개의 비석과 40여개가 넘는 건축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문화혁명 기간 중 파괴된 상당수의 비석과 유물들이 상처 입은 모습으로 무지몽매한 후손들을 꾸짖고 있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언젠가 다시 만나는 것 (회자정리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返). 하지만 평범한 범부에게 있어서 벗과의 헤어짐의 슬픔은 결코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음에 우리는 긴긴 겨울 밤 내내 공부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대접하였다고 해서 유명해졌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중국 10대 명주로 손꼽히는 알코올도수 39도의 공부가주(孔府家酒)를 마시며 이별의 섭섭함을 달랬다.
 

(중국의 10대명주 공부가주)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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