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 보현산 천문대 여정
“아주까리 동배야 더 많이 열려라/산골집 큰애기 신바람난다/아라린가 스라린가 영천인가/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머루야 다래야 더 많이 열려라/산골집 큰애기 신바람난다/아라린가 스라린가 영천인가/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2000년 6월 18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북한 어린이 공연단이 흥겨운 가락으로 불러 화제를 모았던 ‘영천아리랑’이다. 당시 영천이 어느 지역인지 논란이 있었지만 북한 문헌에는 대구 인근의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 ‘영천아리랑’의 무대라고 밝히고 있다.
이수삼산(二水三山)의 고장 영천에 본래 ‘영천아리랑’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로 이주한 영천 출신 농민들이 두고 온 고향산천이 그리워 ‘영천’이라는 지명을 넣어 불렀던 아리랑이 훗날 만주에서 북한으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영천으로 당당하게 귀환했다.
보현산 천문대에 오르는 ‘보현산 하늘길’은 아리랑 고개보다 더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산길이다. 출발점은 화북면 자천리의 오리장림(五里長林).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된 오리장림은 400여년 전 고현천 변에 조성된 방풍림으로 길이가 오리(2㎞)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버드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곰솔,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노거수들이 울창한 오리장림의 현재 길이는 약 500m. 최고령 나무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가시버시가 되어 300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연리목으로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숲에는 나그네에게 쉼표를 찍고 가라고 빈 벤치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오리장림이 끝나자마자 만나는 화북면 소재지는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시간이 정지한 듯 1970년대의 풍경이 오롯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은 자천교회의 나무종탑. 돌담길 골목 끝에 위치한 자천교회는 1904년에 건축된 한옥교회로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미군의 공습이 임박하자 교인들이 지붕에 횟가루로 ‘CHURCH’라고 써 폭격을 피한 일화도 전해온다.
요즘도 주일마다 나무종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는 자천교회는 남녀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도 설치되어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반영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과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천교회는 용마루가 짧고 지붕이 넓은 우진각지붕을 채택하는 등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천교회의 종소리를 뒤로 한 ‘보현산 하늘길’은 화북면 횡계리에서 횡계구곡(橫溪九曲)을 벗한다. 횡계구곡은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만양·정규양 형제가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구곡원림. 2㎞ 길이의 시냇물과 계곡을 따라 쌍계, 공암, 태고와, 옥간정, 와룡암, 벽만, 신제, 채약동, 고암 등 9개의 절경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이어진다.
횡계구곡 중 으뜸은 4곡인 옥간정과 5곡인 와룡암. 보현산에서 발원한 청류가 와룡암을 휘돌아 흐르며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에 심신마저 청량해진다. 형제는 와룡암의 정취에 반해 “오곡이라 구불구불 경계가 더욱 깊고/와룡암 위에는 푸른 숲이 덮여 있네/구름을 일으켜 비 내림은 너의 일 아니니/완연히 자재(自在)의 마음에 맡겨 놓을지다”고 노래했다.
사시사철 햇볕이 드는 양지마을의 투박한 돌담길과 반대로 늘 그늘이 지는 음지마을 앞 도로를 달리면 보현산 정상의 천문대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정각리 별빛마을. 마을에 보현산천문과학관이 들어서고 별빛축제가 열리더니 최근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등 별과 우주를 주제로 담장에 벽화가 그려져 마을 전체가 동화책으로 변신했다.
‘보현산 하늘길’은 정각리 별빛마을에서 보현산 천문대까지 찻길과 임도로 갈라진다. 별빛마을에서 보현산 천문대까지 자동차로 달리는 천수누림길은 9.3㎞. 구들장길로 명명된 임도는 보현산 8부 능선의 쉼터까지 5㎞로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짙어가는 보현산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들장길은 온돌의 구들을 캐던 채석장이 있어 명명됐다.
‘보현산 하늘길’은 구들장길의 쉼터와 만나기 전에 몇 차례 S자를 그린다. 경사가 워낙 가팔라 모롱이를 돌 때마다 하늘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길섶에는 할미꽃과 산철쭉을 비롯해 온갖 야생화들이 천상의 화원을 연출한다. 천문대에 오르기 전 길은 또 한번 연속으로 S자를 그리며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환상에 젖게 한다.
길은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서 보현산 정상인 시루봉(1124m)까지 1㎞ 길이의 데크로 연결되어 있다. 양지꽃, 민들레꽃, 제비꽃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데크를 꿈길처럼 산책하다보면 어느새 조선시대의 관천대(觀天臺)가 있던 시루봉이 나온다.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시루봉에 서면 팔공산 오봉산 채약산 기륭산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곳에서 맞는 해돋이와 해맞이도 장관이다.
1996년 4월에 탄생한 보현산 천문대는 국내 최대 구경인 1.8m 반사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이 설치된 광학천문관측의 중심지. 우리나라에서 발견해 ‘통일’ ‘보현산’ ‘장영실’ 등 우리말 이름이 붙은 소행성 12개 중 11개가 산신령처럼 머리가 허연 전영범 천문대장의 작품이다.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리 별빛마을의 하루는 민들레꽃을 닮은 노란별이 뜨면서 시작된다. 밤하늘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별빛이 온 몸을 감싼다. 직녀별은 26만 년 전의 빛이고, 백조자리 꼬리별인 데네브는 1600만 년 전의 빛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태초의 빛이 쏟아지는 보현산 자락. 그곳에는 횡계구곡에서 글을 읽던 선비들의 낭랑한 목소리와 자천교회의 은은한 종소리,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영천아리랑’의 애절한 가락이 별빛에 묻어난다.
도망길 같은 소로가 꼬불꼬불 보현산 허리를 휘감아 돌아 1천150여m 고지로 이어져 있다. 지금은 동양 최대의 망원렌즈를 보유한 천문대가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 또 다른 하늘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태생이 하늘이라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늘로 오르기를 염원하는 숙명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서인지 뭇 생물들의 생리처럼 오르는 길을 좋아하는 심성을 편향적으로 가지고 있는 듯하다.
보현산 하늘길은 영천시 화북면 정각리 별빛마을에서 발원해 무려 33㎞의 장구한 뱀띠 길로 가물하게 하늘로 이어진다.
별빛마을에서 정상까지 오르다 보면 다른 계절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등고선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4월 중순에 보현산 뿌리에서 첫걸음을 시작해 산허리로 오르다 보면 바닥에 개나리는 벌써 지고, 벚꽃이 만발해 눈꽃으로 날리며 푸른 싹이 여름으로 향하고 있어 이내 땀을 훔치게 한다.
산 중턱에 이르면 벌써 몸은 후끈하게 달아오르지만 다리를 쉴 요량으로 잠시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찬 기운이 이내 싸아하게 전신을 옥죈다.
다시 진달래와 철쭉의 빨간 꽃잎을 만나면서 하늘길을 오르다 보면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겨우내 움츠렸던 갑옷을 벗고 새봄을 준비하는 생명력 넘치는 모습과 마주할 수 있다. 좋은 길로 들어서 운이 좋으면 복수초의 노란 입술도 만날 수 있다.
정신없이 계곡을 따라 산 중턱을 넘어서다 보면 옛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 길 흔적을 느낄 수도 있다.
보현산은 보물이 많고 현기가 가득하다고 했다. 저마다 하늘에 이르는 길이 다르듯 보현산을 오르는 길도 많다. 등성이로 이어진 등산길과 계곡 따라 이어진 산사람의 길, 꼬불하게 흔적이 가끔씩 드러난 옛 하늘길….
지금은 정상까지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천문대로 이어진 포장길도 있다. 정상에는 보현산천문대가 하늘로 다리를 이어주는 망원렌즈를 장착하고 현실감 넘치게 존엄한 자태로 등산객들을 맞이한다.
■ 보현산 다섯 갈래길
영천시는 천혜의 보고 보현산을 그냥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인근 화북면 입석리에 낙동강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보현산댐 건설공사가 대규모 사업으로 진행되면서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고 있어 이를 보현산 하늘길과 연계해 관광명소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보현산 하늘길은 다섯 갈래길로 조성될 계획이다.
첫 번째 노선은 별빛마을에서 팔각정으로 이어지는 5㎞의 구간을 웰빙숲으로 조성해 치료길과 구들장 채석장 스토리를 엮은 ‘구들장길’로 하나의 노선을 만든다.
두 번째로 별빛마을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11㎞의 하늘길은 ‘천수누림길’로 천문대와 정상의 시루봉을 이어주는 구간이다. 구간 중간쯤 1㎞는 테마가 있는 데크로 조성된다.
세 번째 하늘길인 ‘태양길’은 음지마을에서 양지마을을 잇는 5㎞ 구간으로 조성된다. 이 구간을 걷는 등산객들에게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경관정비는 물론 돌담길도 조성할 계획이다.
네 번째 하늘길은 새롭게 조성되는 ‘보현산댐길’이다. 옥계마을에서 별빛마을까지 7㎞ 구간을 연결하는 이 길은 보현산댐을 경유하며 물길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늘길의 마지막 다섯 번째는 ‘횡계구곡길’로 횡계마을에서 별빛마을로 이어지는 5㎞ 구간으로 구곡원류와 옥간정 등 문화재도 탐방할 수 있는 역사의 길로 자리 매김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천시는 하늘길을 오는 21일부터 열리는 별빛축제에 참가하는 관광객들에 소개한다는 계획이다. 영천 하늘길을 축제 기간동안 적극 홍보해 많은 등산객들이 찾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영천시는 하늘길이 매년 5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참여하는 우수 축제로 지정된 별빛축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아이콘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관광객들이 영천을 찾아 과학과 하늘길을 걸으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관광의 핵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보현산 하늘길은 총 연장 33㎞로 5개의 전망대와 9개소의 쉼터, 5개의 공중화장실을 비롯해 안내센터와 숙박, 주차장이 설치돼 있다.
또 하늘길 주변으로는 보현산댐과 웰빙숲이 자리해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자랑하고, 보현산천문대와 천문과학관, 조망대 등은 천문자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각리 3층 석탑과 모고헌, 옥간정 등 문화유적도 하늘길과 동행하고 있고, 가족들이 함께할 수 있는 별빛테마체험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