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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팔공산 왕건 누리길 1구간 1-1(왕건 전투길),1-2 (열린 하늘길)

최두호 2017. 11. 21. 12:30

 

 

왕건 누리길 1-1구간 왕건전투길

(신숭겸장군 유적지 ~ 열재(노태우대통령생가)

 왕건 전투길은 팔공산 올레길2구간(한실골가는길)과 겹친다.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한실골, 용진마을을 거쳐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에 이르는 길이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일대 왕산은 그 옛날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싸움(공산전투)을 벌인 곳이다.
 신숭겸 장군이 수세에 몰린 왕건을 구하고자 왕의 옷을 입고 싸우다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공부에 빠져 길을 가다보면 한실골에 접어든다. 한실골은 대구 동구청이 산주의 동의를 얻어 정비한 임도다.

 봄·여름엔 녹음을,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이다. 길의 초입과 중간쯤에 쉼터도 2곳이 있다. 두 번째 쉼터는 언덕이다. 두 번째 쉼터까지는 오르막길로, 길 양옆에 소나무 숲이 운치를 더 한다.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솔잎 부딪히는 소리도 들린다.
 언덕에 오르면 한실골의 백미가 눈앞에 펼쳐진다. 팔공산의 정상인 비로봉(제왕봉)이 정면을 가득 채우고, 좌우로는 동봉과 서봉이 길손들을 반긴다.

 두 팔을 크게 벌린 뒤 시원한 산내음을 가슴에 가득 담는 장소랄까.
 언덕을 지나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오솔길이 나오고, 이내 정겨운 시골마을을 연상케하는 용진마을이다.

 마을 구경을 하면 어느덧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에 닿는다. 포토존은 두 번째 쉼터가는 길과 그 언덕의 팔공산 전경이 아닐까. 편도코스로 3시간 정도 걷는다.

 

왕건누리길1구간

 

 

 

 

왕건 전투길 트래킹 경로(지묘동 신숭겸장군 유적지 - 한실골 탐방센터 - 대곡지 - 원모제 - 쉼터 - 만디소원고개 - 왕건 전망대 - 열재 - 신용동 - 노태우대통령생가 - 하늘다리) 약5.0km

 

대구시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유적지 입구의 해태상과 뒤로 보이는 왕산(王山)

<고려 태조 왕건이 올랐던 왕산(王山).지금은 단지가 되어있는 왕산. 왕산은 아주 자그마한 산이지만 반만년 역사에 큰 분수령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태조가 견훤의 포위망을 피해 오른 연고로 지어진 이름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때 왕건이 견훤에게 살해당했다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인지, 아니면 견훤에 의해 후백제가 삼국을 통일했을 것인지 미지수였을 만큼 격렬했던 전장이 이 산 부근(附近)이기 때문이다.

'견훤에의해 유린당한 신라를 구원하러 출병한 왕건은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팔공산에서의 공산전투가 동수회전(桐藪會戰)'이다.

결과적으로 왕건은 대패하고 장수 신숭겸이 왕건 복장을 하여 견훤군을 유인하는 사이 태조가 간신히 몸을 피해 오른 것이 왕산(王山)이다.

(사실적으로는 현재의 왕산보다는 파군재옆의  봉무토성이 있는 야산이 왕산일 가능성이 매우크다. 독좌암의 전래와함께)

 

 

 

 

 태조 왕건과 신숭견 장군 유적지

고려시대는 대장경 등 목판인쇄물의 판각과 함께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 인쇄역사상 간과 할 수 없는 창조적 기술발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를 연 고려 태조 왕건의 발자취가 내 고장 대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고려의 왕위에

추대되어 후백제의 견훤과 삼국의 패권을 다투던 중,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약탈하자 친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대구 공산에서 일전을 벌이니 이를 동수회전(桐藪會戰)이라 한다.

병산대전, 운주대전과 함께 고려 통일전쟁의 3대전투로 유명한 이 동수회전은 공산 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 전쟁에서 왕건의 대병은 견훤에게 패전하게 되는데, 대패한 왕건은 신숭겸의 지략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백제군의 추격을 피해 반야월,

안심을 거쳐 대구 앞산 안일사 까지 달아났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 때 대장이었던 신숭겸 장군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형세가 막다른 지경까지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 장군이 몸으로써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옷을 입고 김낙(金樂)장군과 더불어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장군을 태조 왕건으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하던 군사가 풀리어 태조 왕건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에 태조 왕건이 장군의 시신을 찾으니 목이 없어 분간할 수 없자 장군의 발 아래의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로 인하여 시신을 찾고 장군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고 금두상이 도굴될 것을 두려워하며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하였다. 지금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는 봉분이 세개인 장군의 묘소가 있는데, 어느 것이 공의

 봉분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태조 왕건은 그의 충절(忠節)을 기리어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신

(壁上虎騎衛太師開國功臣)으로 추봉(追封)하고 시장절(諡壯節)이라 하였다.

 조선시대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받들어진 신숭겸(申崇謙)(?∼고려 태조 10년, 서기 927년)의

원래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시호는 장절공이다. 그의 본명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

(지금의 춘천) 사람이다. 어느날 장군이 태조 왕건을 따라 평산을 거쳐 갈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고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여러 장군들에게 기러기를 활로 쏘라고 명하자 장군은 어느

 기러기를 쏘아야 할 것인가? 라고 묻고 태조가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라고 하자 화살 한

대로써 날개를 맞히니 태조가 감탄하여 기이히 여기고 기러기가 있던 땅을 장군에게 주니

이로써 장군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춘천)에 예장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토지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지묘사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폐사되었으나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절을 추모하였다.

대구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1981년 7월1일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신숭겸장군 동상

 

 

 

태조왕건이 장절공의 시신을찾아 춘천으로 옮겨 장사지내고 시신을 찾은 그자리에 순절단(표충단)을 쌓고 피묻은 투구등을 묻었다고 한다.(그리고 그용도가 불분명한 죄측의 연화대)

 

수령이 400년정도 된 이 배롱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으며 나라를 위하여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그의 장렬한 죽음은 천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까지도 모든이의 귀감이되고 있는 장군을 기리는 뜻에서 "신숭겸장군 나무라 이름지었다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비>

  이 비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순절지에 세워진 것으로 순조 19년(1819)경 신숭겸의 28대손 의직이 세웠다고 한다. 철종 7년(1856)에 순절비 보호각을 설치하였으며 고종 9년(1872)과 1928년 두 번에 걸쳐 비각을 중수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로 전라도 곡성에서 출생하여 광해주(지금의 춘천)로 이거, 918년 태봉의 기장으로 홍유, 복지겸 등과 궁정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 후 대장군이 되어 태조 10년(927) 공산동대전에서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에 왕건이 포위당하자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옷을 바꿔 입고 전사하였다. 왕건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했다. 그의 장렬한 전사는 고려 역대의 추앙을 받았다. 신숭겸 장군의 순절 후 예종 15년(1120) 8월 왕이 서강에 행차 시 그해 10월 팔관회에 참관해서 김락, 심숭겸을 소재로 한 잡극 중 가상(假像)이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도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심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말함을 알고 감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표충재, 표충사 등과 함께 신숭겸 장군 유적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한식에 향사를 받든다.

 

 

 

 

표충재 정문

 

태조(太祖) 왕건(王建)나무

왕건(재위기간:918-943)고려 제1대 왕으로써 시호는 신성(神聖)으로 태수 융(隆)의 아들이다.

25년간 재위하면서 국가안정을 위해 호족세력을 회유하고 토지제도를 바로 잡았으며,

궁예이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등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3대 건국이년으로 삼았다.

특히 신라를 항복시키고 돌아가는 견훤과 이곳 공산에서 마주쳐 싸웠으나 크게패하고 목숨까지 경각에 달렸을때

신숭겸,김락 장군등이 자기를 살리고 자신들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후에 왕건이

찬란한 고려문화의 꽃을 피울수있었다.수령이 약400년 정도된 이팽나무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기리기 위하여 태조 왕건 나무라 이름지었다.

 

신숭겸 장군의 스토리 텔링

 

신숭겸장군 유적지를 지나 동화천옆 지묘동 안쪽 한실골로 본격 누리길 탐방에 들어간다.

 

신숭겸장군 유적지 돌담길

 

 

 

지묘동의 골짜기인 한실골은 왕산옆으로 난 길을따라 형성된 골짜기로 대곡(大谷)이라 부르기도한다.큰골짜기란 뜻이다.

 

 

 

 

 

 

 

 

 

 

 

쉼터1

 

쉼터2

 

 

 

 

 

만디 소원고개(만디 체육공원)

 

좌측 응해산으로해서 왕산가는 능성과 우측 응봉에서 흘러나오는 능선이 형성해놓은 '한실(큰골)'골.지묘동 아파트들이 들어선후 가장인기있는 운동코스로 부상해있다.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가 산책수준의 운동을 즐길수있으니 응해산-응봉사이의 240m높이인 만디고개

 

 

 

 

 

 

 

왕건길 전망포인트(팔공산 비로봉에서 ~ 초례봉까지의 산마루금이 조망된다)

 

 

 

 

 

 

 

 

 

 

 

 

 

 

 

 

 

 

 

 

 

 

 

 

 

 

 

 

 

열재

열재는 옛날 파계사골과 백안을 연결하는 소중한 통로였다.그걸 넘으면 '속골' 을 거쳐 미대동으로 갈수있기 때문.1942년 서촌초등학교가 생기기전 파계사 부근의 아동들은 열재를 넘어 공산초등학교에 다녔다.

현재의 70대 중반 이상된 어른들이 모두그랬고 노태우 전대통령도 이재를넘어 학교를 다녔다한다.옛적에는 험한 산세로 주위의 산짐승과 산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자

 10명이상이 모여서 넘어다녔다고해서 열재라 한다고 전한다.

 

 

 

 

 

이곳 열재에서 저목계단으로 직진하면 하늘다리가 바로 나오지만 왼쪽 신용동으로 내려서서 노태우 전대통령 생가에들러서 하늘다리로 오른다.

 

 

 

 

 

 

 

 

 

 

 

'용의 머리'에 자리한 노태우 전 대통령생가

팔공산 자락의 고즈넉한 산촌마을인 신용동 용진마을에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인 노 태우 전 대통령 생가가 자리해있어 살아있는 역사교육현장으로 이용되고있다.

소담스런 돌담길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서면 안채와 사랑채,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대통령의 생가가 고향집같은 모습을 하고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바깥채에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그리고 아버지의 서재,방앗간,창고가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 안채에는 부엌과 할머니가 계시던 큰방,마루,어머니방 등이 있다.

부엌 뒤쪽 단지옆으로 정화수 그릇이 오롯이 놓여있는것이 모친의 정성을 보는듯하다.우리들 어린시절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어머니방 옆으로 마당 한켠에

노태우 전대통령의 동상이 자리하고 옛추억을 생각하듯 큰방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노태우대통령 생가에 얽힌 풍수이야기

용진마을 위쪽 끝자락에 자리한 생가는 마치 한 마리의 큰 용이 도사리고 있는듯하며, '용의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가로 들어서는 입구계단은 2~3m 높이의 자연암반을 이용해 만든것으로 마을뒷산 능선이 마당 끄트머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있다.

 마당 입구와 집뒤편에는 자연석 암괴가 박혀있는데 이렇게 집터주변에 바위가 있을때 풍수에서는 그것이 좋은 바위이면 권력을 나타낸다고 해석을 하고있다한다.

 

 

 

왕건누리길 1-2구간 (열린 하늘길)

(하늘다리<열재> - 거저산 - 하늘마루 - 용수마을- 부남교)

1-2구간 열린하늘길 트래킹경로 : 열재(하늘다리) - 능선 - 거저산 - 하늘마루 - 용수마을 - 부남교

 

 

 

 

 

옛적에는 열재를 통하여 내동 속골과 신용동을 오갔다하지만 현재는 이곳 잘닦여진 임도를 통하여 넘나든다

 

고개위로 예쁘게 놓인 하늘다리를 건너서 거저산으로 향한다.

 

 

  

 

 

 

 

 

 

여기서 거저산까지는 고도를 서서히 높인다.

 

 

 

지나온 만디고개방향

 

거저산

거저산이란 명칭이 정확한지는 불분명하단다.용진마을 어른들은 그냥 '들미(산)'라한다.

산줄기가 잠깐 들고 오르는 양상을 묘사한'들'과 산의 우리말인 '뫼'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이는것,

그런데도 '들뫼'의 현지발음인 '들미'를 '들밑'(밑을 들어올리다) 으로 해석해 거저산(擧底山)이라는 어려운

한자이름으로 만들어졌을 개연성이크단다.

 

 

 

 

 

팔공산 주능선의 스카이라인이 잘조망된다고 하늘마루라 부르는갑다.

 

 

 

 

 

 

 

 

 

 

 

용수마을 용수천의 부남교까지가 1-2구간 열린하늘길이다 이제한 반정도 왔는가보다.  이곳 용수동에도 미나리열풍이 부는모양이다 구석구석 미나리 판매집이다.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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