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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정보 녹색길..1, 2

최두호 2017. 11. 21. 12:28

 

강정보 녹색길..1 

 

 

 

 

 

 

 

 

 

 

 

문양역앞 동네에 예쁘게 지어진 황토집

 

문양역앞 버스정류장에서 성서2번 버스를 타면 약20여분 소요후 묘골마을(육신사)입구에 도착한다

 

 

 

육신사와 묘골마을

묘골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배향한 육신사와 얼마전 개관한 기념관이 있으며

특별히 귀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보물로는 태고정이있고,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곡재와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삼가헌 등 많은 건축물과 유물이 남아있다. 

특히 묘골이 충절의 고향이라 일컬어지고 있는것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일족이 큰 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보여온 삶이 충(忠)과 효(孝)를 실천하며 살아온것 때문이라하며 조선 단종때 사육신의 한사람인

취금헌(醉琴軒)박팽년(朴彭年)선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영남의 대표적 양반마을 묘골이다.

박팽년 선생은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인수(仁搜) 호는 취금헌이다.1417년에 태어나 18세때인 세종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輯賢殿學士)가 되어 성삼문등 여러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여 여러가지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문종을 보필하였고 문종이 재위2년만에 운명을 달리할때 역시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외직에 있는 동안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안평대군(安平大君-세종의 셋째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

이 일어났고, 그후 형조참판(법무부차관)으로 제수되어 내직으로 들어온 박팽년을 비롯하여 사육신중 다른

다섯분(성삼문,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등과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함께 모의했던 김질(金瓆)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 결국 세상에 밝혀져 단종복위가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체포, 투옥되는데, 평소 그의 재주를 아끼던 세조가 김질을 옥중에 보내어 모의사실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마지못한 세조가 친국(親鞫)을 하게 되는데 자신을 상감이라 하지않고 나으리라고 대답을 하니 세조가 노하여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하였거늘 "이제 와서 나를 상감이라 하지 않느냐?" 고 하자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충청관찰사로 있을때에 올린 장계(狀啓:외직에 있는 관원이 왕에게 올리던글)에 신(臣)자를 써야 할곳에

거(巨)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더욱 노한 세조는 그러면"내가주는 녹봉(祿俸)은 받지 않았느냐?"고 하자

한톨의 곡식도 받지 않았다고하여 확인해보니 충청감영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에 더욱 노한 세조의 혹독한 고문으로 8일만에 옥중에서 순절(殉節)하였고 이조판서로 있던 그의 부친(박중림)과

부친의 4형제,그의 아들 삼형제등 3대에 걸쳐9명이 처형되었으며 다른 다섯분의 사육신또한 같은 방법으로

집안의 3대(부모,자신,아들)의 가족들이 처형당했다.

부녀자들인 모친,처,제수,며느리들도 모두 대역죄인의 가족이라하여 공신들의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되어

끌려가고 말았다. 온 집안이 멸문의 화를 입을때 그의 둘째아들인 박순(筍)의 아내(성주이씨)는 친정이 대구의

하빈이었다. 그래서 친정이 가까운 대구(닭발골)로 와서 관비로 있던중 유복자를 낳게됨에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몰수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이때 우연히도 같은날 부인의 여종이 딸을 낳았다.그래서 이들은 아기를 두아기를 모두

살리기 위하여 서로 바꾸어 기름으로서 아이들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7세가 되었을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정2품,현도지사)

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만 살수있느냐?

 자수하여 떳떳하게 살도록하라"며 한양으로 갈것을 권유하였는데, 이때는 임금이 바뀌어 성종이 왕으로 있었다.

조정에서도 사육신들에 대해 옳은 일을 했다느 여론이 일고 있어서 서울로 올라간 박비는 성종임금 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충신의 자손이라 칭찬하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며 성종은 사육신중 오직 하나남은 핏줄이라

박비의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이라 고치고 사복시정(司僕侍正:궁중의 가마와 마필,목장을맡은 책임자)의 벼슬도

내렸다.박일산은 성종10년(1479년) 묘골로 돌아왔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하였으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여섯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으로 묘골

순천 박씨 입항조가된다.

그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절의를 우러르며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충정공 취금헌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어느날 선생의 현손인 계창(繼昌)공이 선생의

제삿날에 여섯어른(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꾸게 되고 이후 다섯분의 제물도 함께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고,그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양했는데, 조선 고종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되었다. 그후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엇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忠孝)위인 유적 정화사업"에 따라 정면 5칸,다포식 겹처마 팔짝지붕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외삼문(外三門),삼충각,숭절당,관리사,담장등을 갖추었다.

 

 

 

사육신 기념관<펌>

사육신 기념관은 육신사 보존회가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이곳 묘리의 내역과 현황,

사육신의대한 역사적내용 등을 영상물로 관람할수있는 시설을갖추고있고 각종 유봉의전시와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

 

 

 

 

 

충효당(忠孝當)

충효당에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여가시간에 충효와 예악(그림,글씨,악기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궁도와 마술등을 실습시켰으며, 부녀자에게는 내 청사에서 규문 법도와 가정내칙을 가르쳤다.

조상들의 일상생활과 여가생활을 알아보는데 귀중한 자료인 충효당은 인조22년(1644년) 충정공의 7세손으로

금산군수를 지낸 숭고(崇古)공이 별당으로 건립한것을 그후 충효당으로 고쳐 불렀다.

1916년에 후손 최동(最東)공이 이를 중수한바 있으나, 백년가까운 세월이 다시 흐르는 동안

잘돌보지 못하여 무너질 위기에 놓였던것을 충정공의 후손 우손(禹孫)은 이를 묘골마을입구에 다시 옮겨세웠다.

 

 

 

묘골아름마을

사육신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 충정공파 세거지마을

 

 

 

 

 

주식회사 삼성 일군 내조의 여왕이자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터

호암 보다 세살연상의 박두을여사는 1907년 11월8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산골마을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아버지와 어머니 손씨의 4녀로 태어났다.

묘동마을은 순천박씨의 토착촌이었다. 박팽년의 후손답게 선비였던 아버지 박씨와 '교동댁'으로 불렸던 어머니 손에서 박여사는

엄격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어릴적에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좋아 '두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한다.십오륙세 되던 무렵 어느날,

절에서 시주를 나온 한스님으로 부터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

라는 말을 들었다고하니  스님의 예견이 적중한 일화가 있다고한다.박두을 여사의 생가터는 현재 마무리조성중에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글씨인 육신사 편액

 

박팽년 선생의 17대손이자 전 박주규 국회의장의 부친이기도한 취운공의 생가터이자 주변 8만여평의 유산을 육신사 보존회에 기증하여

사육신의 유덕을 기리겠다는 공의 뜻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공덕비

 

 

 

 

취금헌 박팽년 영정(육신사 기념관)

평소 가야금을 타기를 좋아해 스스로  취금헌 이라는 호를 지은 박팽년 선생의 영정은

충남대학교 회화과 윤여환 교수(58)가 박팽년의 직계후손의 집성촌인 달성군 하빈면 묘골을 중심으로 순천박씨 문중얼굴을

촬영, 그들의 용모 유전자 계측도를 토대로 2년여의 산고끝에 제작되어 국가표준영정 81호로 지정되었다.

 

때마침 오늘이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종친회(제16차 묘골방문의날) 행사날이라 나도 잠시 참석하여 푸짐하게 식사와 음료를 대접받았다.

 

 

 

태고정(太古亭)

취금헌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세운 태고정은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부르며 655평의 터에 자리잡아 건물2동(30평)이 보존되어있다.

이 정자가 원래 서있던 건물의 위치를 보면 정자의 북편에 사육신의 절의묘가 있고 남서쪽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 종택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홍전문과 이문이있어 절도사이하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서 내렸다고한다.

선조25년 임진왜란때 왜병의 방화로 사우(사당)와 태고정 일부만 남기고 다타버렸으며, 선조29년 총관공 충후공이

다시 세웠으며 임진왜란중에 왜병이 육신사의 사당 서북쪽의 기둥을 도끼로 찍으니 기둥은 상하지않고 자기발만

찍혔다고 하며 또, 사우와 태고정에 불을 지를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치고 많은 비가 쏟아져 저절로 불이

꺼졌다고 전한다. 왜병들이 그 신기함에 몹시 두려워할때 총관공의 아우 충서(판관공)공이 왜병을 격퇴 시켰다.

그러나 충후공의 두딸은 왜병에 쫓겨 구봉산 탁대위에서 낙동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후에 체찰사가 육신사의

도끼 자국과 불난 흔적을 보고 시를 읊어 정각에 걸었다

『 난 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도 남기 어려운데

오직 육선생 사당만은 산기슭에 우뚝 서 있네

선생들의 충절은 신명이 감동하여 하늘도 도와주시니

오랑캐의 불길이 어찌 혼령을 놀라게 하리.

선조31년(1598년) 12월 27일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송정사

 

 

 

육신사 준공 기념비(친필휘호)

 

 

 

충의사 전경

 

사육신 박팽년의 아버지인 박중림의 문민공 유적비

 

 

 

도곡재

도곡공은 인조때의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절의와 덕행을 모두 갖추어 동방의 1인자라 칭송받았다한다

 

 

 

 

 

 

 

 

 

 

 

 

 

 강정보 녹색길.. 2

 

안내도상 으로는 묘골 육신사 견학후 다시 마을입구로 되돌아나와 삼가헌쪽으로 진행하지만 시간과 효율적으로는 육신사

육신사 입구에서 좌측으로 팔각정으로 오른후 노란선방향으로해서 삼가헌방향으로 진행하는것이 좋다.

 

육신사를 관람하고 다시 묘골마을입구로 나와 강정보 방향 표시를 따라 우측산길로 접어든다.되돌아오지 않아도 육신사 마을 뒷편으로해서

팔각정으로올라 삼가헌으로가도 된다.오늘은 안내도에 충실하며 진행한다

 

 

 

숲속에 흔들의자가 예쁘게 나그네의 발길에 안락한 쉼터를 제공한다.

 

 

 

낙빈서원(洛濱書院)

낙빈서원은 묘리 파회마을에 있으며 사육신을 배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빈사(河濱祠)를 세워서 모셔오다

숙종17년에 별묘(別廟)를 지어 춘추향사 하게되니 이사당을 낙빈서원이라 했다.

 

 

하엽정(荷葉亭)

광석공의 손자인 규현(奎鉉1817~1875)공이 1874년에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채인 하엽정과 연당을 건립하였다.

하엽정앞의 연당은 본채(삼가헌)을 지을당시 많은 흙이 필요해 파인자리를 하엽정을 세우면서 연꽃을 심어 연못으로 가꾸었으며

 하엽정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삼가헌(三可軒)

충정공 박팽년의 12대손인 광석(光錫1764~1845가선대부 한성부우윤)이 이웃한 묘골에서 이곳파회로 분가해 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광석공의 부친인 성수(聖洙1735~1810)공은 1769년에 현재의 정침 터에 초가를 짓고 삼가헌이라 했는데 그아들 광석공이

1809년 기사년에 초가를헐고 정침을 지었으며 18년후인 병술년에 사랑채를 지었다.광석공의 손자인 규현이

 1874년에 별당채인 하엽정을 건립하였으며 2007년 1월29일 "달성삼가헌"으로 지정명칭하였다.

이집이 삼가헌이라 불리는 연유는 사랑채에 걸려있는

삼가헌기(三可軒記)에 적혀있다.즉,천하와 국가를 가(可)히 고르게 할수잇고 작록(爵祿)도 가(可)히

사양할수있으며 백인(白刃)도 가히밟을수 있다는 뜻이다.

이 삼가헌은 KBS가 방영한 박경리 원작 대하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낙동강 강변대로밑 굴다리를 통과하여 산마루로 올라선다.

 

 

 

 

 

 

 

성주쪽 낙동강변의 참외단지와 낙동강을 시원하게 달리는 제트스키

 

 

 

참 아름다운 소나무숲길

 

 

 

 

 

 

 

 

 

 

 

 

 

 

 

구봉산 전망대

육신사의 태고정을 세운 총관공 충후공(忠後)의 두딸이 임진왜란중에 왜병에 쫓겨 이곳 구봉산 탁대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곳이다.

 

 

 

 

 

 

 

 

 

하목정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직 조성중에 있다.

 

 

 

 

 

 

달성군 하산리에있는 하목정(霞鶩亭)

임진왜란때 팔공산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전의이씨 낙포 이종문공이 1604년에 창건한 정자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이곳에 머물다간 인연이있어, 낙포공의 큰아들 수월당 이지영에게 하목정이라는 정호를

써주시고 또, 은200냥을 하사하시어 중수케했다고 하니 그 내력을 짐작할수 있음이다.

뒤쪽에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분무공신3등에 녹훈되시고, 전양군에 봉작된 이익필 장군의 불천위 사당이있다.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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