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읍 내장산
[산사랑 산사람] 정읍 내장산
아기단풍, 청시닥, 당(唐)단풍, 세열, 털참단풍….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단풍 종류는 약 30여 종.
그중 70% 이상이 내장산에서 자생한다.
축복 받은 이 식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비밀은 기후다.
생태학상 내장산은 중부기후와 온대남부기후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이 경계에서 남대계열의 활엽수와 온대수림이 함께 섞여 분포하는 것이다.
이곳 단풍은 잎이 얇고 투명하며 크기도 훨씬 작다.
이것은 저온에서 쉽게 화학변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장산 단풍의 성가(聲價)를 높인 또 하나의 비밀이다.
기후와 토양과 우수한 수종들이 연출하는 색의 향연,
내장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단풍은 엽록소 분해과정서 발생하는 과학 현상
=가을 한철 우리의 감성자극제로 작용하는 단풍. 역설적으로 낙엽은 배설이다.
수목들은 여름 내내 뿌리로는 물을 길어 올리고 잎으로는
광합성을 하면서 생장한다.
대사를 끝낸 나무는 휴지(休止)에 들어가기 전에 떨켜를 작동시켜
잎들을 털어내는데 이 과정이 단풍인 것이다.
속성상 단풍과 인간은 언제나 이형(異形)의 퍼즐이다.
나무들에게 비움, 청소 과정인 단풍이 사람들에겐 고독, 낭만 같은
우수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얘기지만 단풍은 과학현상이다.
보통 기온이 떨어지면 엽록소의 분해과정에서 카로티노이드 색소가 드러나
잎들은 노란색을 띠게 된다.
효소들의 화학반응에서 안토시아닌 색소가 생성되면 붉은색이,
타닌성 물질이 축적되면 갈색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장산의 ‘내장’(內藏)은 골짜기마다 숨겨진 비경이 끝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봄백양, 가을내장’이라 해서 내장산은 단풍 후광을 업고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로 분류된다.
냉해나 이상기후가 덜했던 올해는 단풍 생장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기상대는 치악산, 속리산, 지리산을 물들인 단풍이
이달 중순까지 내장, 추월산 일대를 채색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내장사-신선봉-금선계곡 코스 최고 인기
=내장산 등산로는 보통 10여 곳에 이른다.
단풍길, 등산로, 유적지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나온다.
보통은 일주문에서 내장사를 거쳐 연자봉으로 오른 후 신선봉-까치봉을 타고
금선계곡-전망대-내장사로 내려 오는 9㎞짜리 원점 회귀코스가 가장 인기가 높다.
인파를 피해 한적한 등산을 계획한다면 추령을 지나 옥정마을 대통령가든을
들머리로 오르면 된다.
등산객들이 거의 없어 한적한 숲길을 차분하게 걸을 수 있고
연자봉-신선대 능선과도 바로 연결된다.
대통령가든 앞마당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접어들면 잡목 사이로 등산로가 펼쳐진다. 이 길은 약초꾼이나 마을 주민들의 통행로로 외지인들에게는 생소한 코스다.
산길은 한적하다. 키 낮은 산죽이 초록빛을 뽑아 올려 산객들을 맞고 등산로엔 수북이 쌓인 낙엽이 쿠션 좋은 카펫을 만들었다.
제일 먼저 장군봉과 만난다. 장군봉은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 희묵 대사가 활약했던 곳이다.
지금도 장군대, 용바위엔 당시 승병들의 무용담이 전해진다.
길게 뻗은 능선을 타고 북동쪽으로 진행하면 연자봉(燕子峰). 연자봉은 산봉우리가 붓끝 같다고 해서 일명 문필봉으로 불린다.
연자봉에서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서면 케이블카 정류소가 나오고 산밑은 바로 내장사로 통한다.
순탄하던 흙길도 이젠 암릉을 열어 놓는다. 등락이 제법 급해진다.
금선계곡을 조망하며 전진하면 널찍한 안부를 펼친 신선봉이 일행을 맞는다.
신선봉은 763m로 내장산 최고봉. 주봉답게 멋진 조망을 펼쳐 보인다.
내장산 9봉이 한눈에 펼쳐지고 금선폭포, 신선문, 금선대를 거느린 계곡이 발밑에서 융단처럼 펼쳐진다.
장군봉-연자봉-신선봉과 마주보고 있는 망해-불출-서래봉 풍경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산등성이에 연꽃처럼 우아하게 자리 잡은 벽련암은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암자를 병풍처럼 둘러싼 서래봉의 위용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위로만 향하던 산은 신선봉을 정점으로 이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활엽수로 울창한 산길을 50분쯤 진행하면 소둥근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재를 따라 진행하면 백암산이고 직진하면 까치봉이다.
여기서 오른쪽 금선계곡으로 방향을 틀면 산길은 바로 내장사와 닿아있다.
이젠 평지길. 신갈나무, 굴참나무, 굴거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용굴 밑을 걸어 나온다.
산은 여기서 작은 계류를 흘려보내며 금선계곡을 펼쳐 놓는다.
계곡은 아담하다. 단풍을 비춰보며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십리길 단풍터널에 펼쳐진 컬러풀 향연
=아이들 소리로 소란한 계곡을 걸어 나온다. 전망대 표시판과 만난다.
급한 걸음으로 망루에 올라 절 아래쪽 풍경을 카메라에 눌러 담는다.
전망대에 오르면 우화정부터 10리 단풍길까지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전망대를 내려서 음악소리로 시끌거리는 내장사로 들어선다.
백재 무왕 37년에 영은 조사가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정혜루를 내려서자마자 일행은 인파에 휩쓸린다.
사찰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108그루의 단풍거리는 말 그대로 터널이다.
우연일까, 108그루의 단풍. 이 숲에 들어서면 삶의 번뇌가 소멸한다는 암시인 것 같기도 하고.
일주문을 빠져 나오면 3.5㎞ 단풍탐방로가 시작된다.
수십년 생 단풍나무로 단장한 이 길은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최고의 단풍 가로(街路)로 꼽힌다.
보통 자연에서 화려한 아름다움은 꽃의 몫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곳이 있으니 내장산 단풍이다.
잎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웅변하듯이. 유감스럽게도 이 가정은 너무 쉽게 입증된다.
관광객들의 시선은 온통 단풍에만 모아지고 카메라 조리개의 잔영에도 온통 단풍뿐이다.
이 ‘아름다운 반란’의 희생자는 꽃들이다.
단풍나무 뒷자락에도 어김없이 들꽃은 피고 가로수 뒤안엔 야생화 군락이 여전히 아름답지만
단풍의 위세에 눌려 힘없이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다.
꽃들도 묵묵히 체념하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그나저나 이 잎들의 반란은 이달 중순까지는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