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충북 보은 속리산
[산사랑 산사람] 충북 보은 속리산
신라 말 진표(眞表)율사는 법주사를 중창하기 위해 보은 땅으로 들어섰다.
밭을 갈던 소들이 대사를 알아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들이 저럴진대 하물며 우리야’ 하며
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길로 낫과 괭이를 버리고 속세(俗)를 떠나니(離)
속리산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도 속리산을 찾았다.
평생을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린 그는 속리산을 쿠데타 합리화를 위한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정이품송, 목욕소, 문장대 설화가 이때 만들어졌다.
스토리의 핵심은 자신의 집권은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
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산을 세속화 시킬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속리(俗離), 세속(世俗). 확연히 다른 두 어휘는 700년 시차를 두고
이렇게 엇갈렸다. 무엇일까,
그 간극은. 의문의 답을 찾아 보은으로 떠나보자.
◆백두대간의 중심에서 산맥`강 흐름 나눠
=백두산에서 시작한 대간 길은 정중앙인 속리산에 이르러 한남, 금북정맥으로
삼분(三分)한다.
흔히 속리산을 흔히 삼파맥(三派脈), 삼파수(三派水)의 산 이라고 말한다.
속리산의 각 방향의 봉우리도 낙동강, 한강, 금강을 가르니 우스갯소리로
문장대에서 튄 물이 동쪽으로 가면 낙동강, 남쪽으로 흐르면 금강, 북쪽으로
향하면 한강이 된다고 한다.
속리산은 8과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국8경’중의 하나며, 봉우리도 문장대를 중심으로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일부 지형이 바뀌었지만 석문(石門)도 대(臺)도 암자도 모두 8개였다.
등산로는 보통 법주사-세심정에서 문장대로 올라
신선대-세심정-법주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가 주류를 이룬다.
출발점 오리(五里)숲은 매표소에서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2km 길을 말한다.
사찰 진입로 하면 해남 대흥사, 승주 선암사를 명품으로 꼽지만
이곳 오리숲도 어깨를 견줄 만하다.
수백 년 연륜이 쌓인 가로수들이 만들어낸 터널을 걷노라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시간과 자연의 순환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던져보게 된다.
중간에 들르게 되는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란을 피해 피신하던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여기서 기도를 했고
야인(野人)시절 태조 이성계도 여기서 구국기도를 했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련지(石蓮池) 등 국보가 3점이나 있고
보물, 문화재, 천연기념물이 100여 점에 이른다.
법주사의 랜드마크는 뭐니 뭐니 해도 금동대불.
지금은 금칠을 한 대불이 산객들을 맞지만 40, 50대들에게 법주사 대불은
1964년에 세워진 시멘트 대불로 각인되어 있다.
당시 그림엽서나 책받침에는 모두 이 시멘트 미륵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30년을 지탱하던 이 미륵불은 1990년 붕괴 직전에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법주사 금동대불 개금불사에 금 80kg 소요
=2000년 들어 사찰 측은 다시 금동미륵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는 2002년 6월에 완공되었다.
3mm 두께로 금을 입혔는데 모두 80kg의 금이 소요 되었다.
절을 빠져 나오면 저수지를 끼고 등산로가 연결된다.
호수 수면 위로 퇴색한 단풍이 떠다니고, 길가엔 쑥부쟁이, 구절초가
조용히 산객들을 맞는다.
저수지 끝에 조그만 다리와 만난다.
다리 위에선 아이들 소리가 요란하다.
다리 밑에서 떼 지어 다니는 수만 마리 피라미 떼가 소란의 진원지.
물고기들은 아이들이 떨어뜨리는 과자를 받아먹고 아이들은 그 모습에 환호한다.
천진난만한 물고기와 이이들의 유희, 우리도 저런 시절을 거쳐 왔으리라. 그땐 우리도 저 물처럼 맑았겠지.
길은 바로 목욕소로 연결된다.
세조가 속리산에서 때(?)를 입힌 두 번째 장소다.
‘정이품송 설화’로 자신의 등극을 하늘의 뜻으로 미화 했다면 목욕소 일화는 자신의 집권은 부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 번 오대산에서의 일화처럼 그는 집권 합리화의 배경으로 불교를 거듭 끌어들이고 있다.
유교사회의 근본인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그이니 기댈 곳으로 불교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당시 세조의 복잡한 계산의 현장인 목욕소는 관광객들의 수다로 소란스럽다. 지금도 소(沼)는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저기 어디쯤에서 세조는 문수동자에게 등을 맡겼을 것이다.
목욕소 앞에서 갈림길과 만난다.
세심정 삼거리서 왼쪽으로 오르면 문장대, 오른쪽으로 오르면 신선대와 연결된다.
상가를 지나는 중 글귀 하나가 눈에 띈다.
‘道不遠人人遠道, 山不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건만,
사람이 스스로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
세속이 스스로 산을 떠났을 뿐) 이 시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글이다.
글이 걸린 지점이 마침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洗心亭)이니 글귀는 자리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이제부터 길을 급경사를 펼쳐 놓는다.
50도 이상의 경사가 종아리를 압박하고 바위로 이어지는 너덜길이 호흡을 압박한다.
9부 능선쯤에서 마지막 계단 길에서 진을 다 빼놓고서야 산은 정상을 허용한다.
눈앞에 거대한 철계단이 펼쳐진다. 문장대는 본래는 구름 속에 잠긴다고 운장대(雲藏臺)였으나
세조가 이곳에서 신하들과 글을 논했다고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
◆천왕봉-입석대-문수봉 등 속리산 주봉들 한눈에
=1,029m 정상에 서니 사방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서남쪽에서는 주봉인 천왕봉(1,058m)이 우뚝하고 입석대, 신선대, 문수봉이 시원스럽게 능선을 펼쳤다.
주봉들 너머로 대간의 줄기들이 잔물결로 일렁인다.
이제 일행은 하산 길로 접어든다. 어느덧 잎새를 떨군 길가의 나무들에서 시간과 계절의 부침을 읽는다.
최근 TV에서 ‘공주의 남자’가 화제가 되었다.
김종서의 손자와 세조의 큰딸 세령과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야사집인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우연인지 수양에 반발해 궁에서 쫓겨난 공주가 은거한 곳이 바로 속리산 자락이다.
속리산 자락을 자신의 우상화 무대로 물들였던 세조.
그가 전국 명소 중 속리산을 선전장으로 택한 이유는 중부권 민심을 다독인다는 목적 외에도
가슴 한켠에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