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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경-토끼비리길 ...<매일신문>

최두호 2017. 11. 20. 17:59

[동행 경북을 걷다](18) 문경-토끼비리길
강과 산에 갇힌 왕건, 토끼 따라 구사일생 ‘아찔한 벼랑길’
 
 
 
문경땅 토끼비리를 찾아갈 때 동행한 정창기 화백과 터무니없는
우스갯소리를 나눈 기억이 난다.
“도대체 그 옛날 토끼가 무슨 비리를 그렇게 저질렀기에 이름이 토끼비리야?”
 ‘비리’는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뜻하는 ‘벼루’의 문경 사투리.
아무튼 토끼비리 이름이 붙여진 시기는 후삼국 초기 또는 후기로 조금 다르지만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이야기는 맞는 것 같다.
 
견훤에 쫓기던 왕건이 오정산이 막아서고 영강이 가로지르는 이곳에 이르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더라는 것.
사람 한명 지날 수 없을 것 같던 길이 토끼 덕분에 열리게 돼 ‘토천’(兎遷),
즉 ‘토끼가 달아난 벼랑길’이라 불렀다고 한다.
 

찾는 길은 쉽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점촌함창나들목에서 내려서 문경읍쪽으로

방향을 잡고 3번 국도를 따라 가면 된다.

나들목에서 11km 남짓한 거리지만 3번 국도는 문경을 가로지르는 영강을

다섯 번이나 건넌다.

진남휴게소를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에 환경관리사업소 폐수처리장이

 나오고,

그 옆길을 따라 마을로 접어들어 잠시 올라가면 목적지 주차장이 나온다.

낮은 고갯마루를 올라서자 왼쪽에 성황당이 보인다.

성황당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는 뒤로 미뤄두자.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고모산성(姑母山城)에 올랐다.

표지판에는 서기 2세기 무렵 축조됐다고 하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470년경 처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옛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복원은 끝났지만 주변 정비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느낌이다.

옛 위용은 되찾았지만 새로 쌓은 돌벽 위에서 1천500년의 역사를 되짚기는

불가능했다.

 

##1700여년 사람 발길에 반질반질

성벽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영강 일대는 가히 장관이다.

북에서 내려오는 조령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드는 가은천(영강)과 이곳에서

 합류해 영강을 이룬 뒤 남으로 흘러내린다.

성벽에 서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 국도,

옛 석탄철로 등이 사방으로 흩어져 뻗어간다.

성벽에서 남동쪽으로 고모산성에서 날개처럼 뻗어나간

석현성(石峴城)이 보인다.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부터 바로 토끼비리 길이 아스라이 이어진다.

석현성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에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 안내를 맡은 문경시청 엄원식 학예연구사는 “이곳 토끼비리는

안타까움이 많은 곳”이라며 운을 뗐다.

옛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가자면 토끼비리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 벼랑을 깎아 길을 내고 그 아래 나무를 덧대서 길을 넓힌 곳.

넓혔다고 해도 그 폭은 3m 남짓 했을 터이다.

굳이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근 지형지세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문경 땅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온통 고산준령으로 쌓여있다.

아래로는 영강이 유유히 흐르는 이곳을 지나려면 그나마 최단거리가

 바로 토끼비리였던 것.

엄원식 학예연구사는 “임란 당시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도 바로 이곳을

통과해 북으로 진격하려했다”며

“만약 토끼비리 길목을 차단하고 공세를 펼쳤더라면 수백명 병사로도

수만명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만큼 방어하기 쉬운 곳”이라고 했다.

 

##영남대로 한양길 최단거리길 애용

왜군이 파죽지세로 영남땅을 유린하자 선조는 신립(申砬) 장군을

문경 땅에 급파한다.

신립 장군의 부장인 백전노장 김여물은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고 건의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한다.

왜 그랬을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 왜군을 막지못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문경 방어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도 전설이 전해온다.

신립 장군이 어느 날 북한산에 사냥을 갔다가

귀신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몰살당한 한 처녀를 구해주게 된다.

처녀는 고마운 마음에 따라나서기를 간청했지만 엄한 장인(권율 장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청을 거절했다.

처녀는 돌아선 신 장군을 계속해서 불렀더란다.

안타까운 마음에 신 장군이 뒤를 돌아보자 그만 처녀는 지붕 위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처녀는 신 장군이 전장에 나갈 때마다 꿈에 나타나 작전을 일러주었고,

그대로만 하면 백전백승이었다.

문경 땅에 당도했을 때에도 신 장군의 꿈에 처녀가 나타났는데,

충주에 가서 달래강을 등에 지고 배수진을 칠 것을 진언했다고.

누가 봐도 쉽사리 왜적을 물리칠 수 있는 유리한 형세를 마다하고

굳이 충주로 물러선데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경 땅은 아쉬움이 참 많은 곳이다.

토끼비리는 최근 나무데크로 길을 단장해놓았지만 여전히 위험한 곳이다.

1천700여년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스쳐가며 돌마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다.

가파른 낭떠러지가 아래 있고, 그 위에선 지금도 돌이 부서져 떨어진다.

취재진이 갔던 날에도 나무데크길이 떨어진 돌에 부서져 구멍이 난 곳을

볼 수 있었다.

삐죽삐죽 날카로운 돌덩이는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큼 컸다.

그 돌이 수십m 거리를 떨어지며 얼마나 세차게 부딪혔으면

그 두꺼운 나무데크에 구멍이 났을까.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아찔하다.

 

##주막 부근 성황당에도 과거길 전설이

석현성 아래쪽 탐방로를 따라가면 신현리 고분군도 만날 수 있다.

신라가 문경 땅에 진출한 6세기 무렵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

수십여기가 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산책하기 좋은 데크길을 만들어놓아 아이들과 함께

찾아갈 만한 곳이다.

석현성 진남문을 다시 지나면 오른편에 한창 주막거리가 보인다.

문경의 마지막 주막인 영순주막과 예천의 삼강주막을 복원해 놓았다.

주막 옆 성황당에도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한양 땅에 과거를 보러 가던 한 선비가 아찔한 토끼비리를 지난 뒤

고갯마루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혼자 있던 처녀는 정갈하게 차린 저녁상을 내온 뒤 간신배의 모함으로

몰락한 집안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녀는 시렁에서 책을 꺼내 보여주는데,

선비는 시(詩) 한 편이 너무 좋아 옮겨적었다.

과거시험에 나온 시제가 바로 그 시였음은 당연한 이야기.

장원급제한 선비는 당시 재상집 규수와 혼인을 올렸고,

처녀는 고모산성에 올라 10년 동안 선비를 기다리다가 죽고 말았다.

벼슬한 지 10년만에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온 선비가 그 집에 들렀더니,

 다 쓰러져가는 집에 가보니 처녀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

후회가 밀려든 선비는 장례를 치른 뒤 임지에 가지도 않고

그대로 조정에 사표를 내고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로 토끼비리를 지나 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 성황당에서 빌면

무사히 한양을 다녀올 수 있었다고. 다시 봐도 이곳은 참 아쉬움이 많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엄원식 문경시청 학예연구사 054)550-6068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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