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봉화-석천정에서 우곡성지까지...<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19)]봉화-석천정에서 우곡성지까지 | ||||||||||
춘양목(금강송)으로 유명한 봉화군이 '봉화 솔숲 길'을 만들 계획이란다.
구상단계일 뿐이지만 완성되면 90km가량의 명품길이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없는 길을 새로 닦는 것은 아니다.
길이란 모름지기 오랜 세월 그곳을 디뎠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애환이 담겨야 제격이 아닌가.
오늘 다녀볼 길은 석천정에서 닭실마을과 산수유마을을 지나
우곡성지까지 14km 구간이다.
영주에서 울진으로 가는 36번 국도에서 유산교를 건너면 봉화읍에 들어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서 물야면으로 가는 915번 지방도를 따라 봉화읍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른다. 오른편 봉화고교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삼계사거리에서 직진한 뒤 삼계교를 건너서 바로 우회전하면 출발점인 석천계곡을 만날 수 있다. 봉화읍이 고향인 박종경 화백이 오늘 동행 겸 길 안내를 맡기로 했다.
계곡 초입에 들어서자 양쪽에 즐비한 솔숲이 반갑게 맞아준다. 석천계곡 길이는 900m 남짓. 사실 계곡이라 이름 붙이기에 주저하게 된다.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 넉넉한 물이 흐르고, 기암괴석마저 넉넉하니 충분히 계곡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초입과 달리 계곡 중간에 자리한 석천정을 지나서 한 굽이 돌고나면 산골짝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별안간 너른들이 펼쳐진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저 멀리 문수산 줄기에서 발원했다. 그 물이 산과 들과 저수지, 그리고 마을을 지나 내성천과 합쳐지기 직전이 바로 석천계곡이다.
박종경 화백은 "어린 시절 이곳은 친구들과 멱을 감던 놀이터였다"며 "물이 맑은데다 계곡도 편평한 편이어서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살다시피했다"고 기억했다. 계곡을 가로질러 소담하게 놓인 나무다리를 지나면 석천정사가 나온다. 이곳 이야기는 잠시 후 닭실마을과 청암정을 만난 뒤로 미뤄두자. 아직 계곡 끝부분은 정비가 덜 됐다. 인근에서 버린 연탄재가 한곳에 쌓여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계곡을 빠져나와 금강송이 드리워진 오솔길로 접어들면 저 멀리 기와지붕이 즐비한 닭실마을이 봄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닭실'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학상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조선 중종 때 대신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들이 500년 가까이 지켜오고 있는 마을.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 양동, 안동 내앞, 풍산 하회와 함께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4대 명당 중 하나로 꼽은 곳이기도 하다.
앞서 석천정사는 충재 선생의 아들인 권동보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을어 만든 34칸 규모의 큰 정자다. 당시 유생들이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데, 밤이면 도깨비가 나와 준동하는 바람에 유생이 줄었단다. 이에 한 명필이 입춘 날에 바위에다 '청하동천'(靑霞同天)이라고 썼더니 도깨비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석천계곡은 '청하'로 불렸다.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에도 전설이 남아있다. 충재 선생이 1526년 거북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세운 정자는 처음에 온돌을 넣었다고 한다.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소리 내어 우는 탓에 이상하게 여겼는데, 어느 날 고승이 지나다가 "거북 등에 불을 때면 되겠느냐"고 충고했다. 아궁이를 막고 마루방으로 바꾸고, 바위 주변을 파내 못을 만들어 바위 거북에게 물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물이 말라 정자의 운치가 덜하지만 영화 '음란서생'과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배경이 될 만큼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다.
충재 선생이 터를 잡은 뒤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던 마을이 바로 닭실이다. 일제강점기에 춘양목을 실어나른다며 철길을 놓았는데, 곧은 길을 놔두고 일부러 마을 앞으로 휘돌아나간 이유도 바로 맥을 끊으려는 일제의 속셈이었다. 닭과는 천적인 지네 모양의 철길을 놓으면 마을의 정기가 꺾일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닭실마을은 한과로도 유명하다. 중종 때 사화에 연루돼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충재 선생이 선조 대에 복권되고, 4대까지 제사를 지내던 유교 제례에서 벗어나 영원히 제사를 받들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지위'에 오른 뒤부터 마을 한과의 역사가 시작됐다.
1992년부터는 마을 부녀회에서 공동으로 한과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 청암정 옆에는 '충재선생박물관'도 있다.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등 귀중한 문화재 467점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닭실마을에서 마을 길과 하천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해 토일, 새말, 탑평 등 옛 마을을 지나면 하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라는 작은 다리를 만난다.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길을 잡고, 600m쯤 올라간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 길을 택하면 동양리를 지나 산수유마을에 닿는다. 꽃망울을 갓 터트리기 시작한 산수유는 마을을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푸른 소나무를 배경으로 빼곡히 들어선 산수유는 마치 푸른 도화지에 노란 점들을 흩뿌려놓은 듯 하다. 마을 끝에 올라 내려다보면 아랫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아스라이 사라지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창평저수지에 닿을 수 있고, 저수지 아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저수지 풍광을 바라보며 명풍 솔숲길을 거닐게 된다. 얼추 2km 남짓 야트막한 숲길을 걷고 나면 다시 포장도로가 나온다. 저 아래 다덕약수터에서 우곡성지로 오르는 주도로다. 다시 2.5km 정도 올라가야 천주교 우곡성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천주교 신앙생활을 처음 실천했던 조선 정조 때 실학자 농은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문수산 줄기다.
문수산에도 재미난 전설이 남아있다. 옛날 문수산 줄기에 가난한 진사와 부유한 백정이 살았더란다. 가난에 쪼들리다 못한 진사가 백정을 찾아가 함께 장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백정은 펄쩍 뛰며 "가족을 봉양할테니 공부에 정진하시라"고 제의했다. 세월은 흘러 진사는 마침내 감사(監司) 자리에 올랐지만 백정은 가난뱅이가 돼 버렸다. 옛 정을 생각해 감영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몽땅 불에 타버리고 가족들조차 행방이 묘연했다. 이웃 사람들 이야기로는 감사가 사람을 시켜 불을 놓았다는 것. 분에 못이긴 백정은 그 길로 금강산에 들어가 10년 동안 검술을 닦았고, 산을 내려온 뒤 원수의 집 담을 넘어갔다. 칼을 휘두르기에 앞서 잠시 주저하는 새, 이조판서에 오른 그 원수가 나타나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10년 전 자네를 잘 대해주었다면 평생 백정으로 지냈을 것이네. 지금 뛰어난 무예를 익혔으니 내일부터 훈련대장이 돼 나라를 위해 일해보세." 알고보니 그 진사는 백정의 가족을 잘 거둬주었고, 일부러 천대받는 백정의 신세를 면하게 하고자 일을 꾸몄다는 것이다.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전설이 다 그러하지 않던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닭실마을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수유마을을 감상한 뒤 우곡성지까지 디뎌볼 일이다. 하지만 거리도 만만치 않고, 돌아오는 길이 염려스럽다. 하지만 닭실마을과 창평저수지 옆길만큼은 놓치지 말고 걸어볼 만한 길이다.
<그림 이야기> 박종경 작-석천계곡 가는 길 닭실마을 청암정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바라보면 석천계곡으로 사라지는 솔숲길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어찌보면 밋밋한 그 풍경을 박종경 화백은 특유의 사실적이면서 초현실적인 기법으로 새롭게 살려냈다. 들판을 상징하는 키에 놓인 몇 알의 콩과 짐짓 태연한 척 바깥 풍경을 응시하는 참새. 그리고 키 윗쪽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솔숲길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박 화백에게 닭실마을 들판은 그저 평범한 논밭이 아니었으리라. 박 화백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곳에 오면 마냥 설렌다"며 "고삐 풀린 송아지처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마음껏 뛰놀던 때가 갈수록 더 그립다"고 했다. 이 그림은 박 화백이 고향을 떠올리는 창(窓)이 된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박종경 화백, 봉화군 관광진흥담당 정상대 054)679-63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