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주-부여 에 대해서...
*.무령왕릉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錦城洞)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
백제 제25대 왕(501~523 재위).
이름은 사마(斯摩:斯麻)·융(隆)·여륭(餘隆).
동성왕의 둘째 아들 혹은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고도 한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502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했고,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고목성(高木城)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하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512, 521년에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 무제(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513, 516년에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일본에 보냈으며,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 충청남도 공주에서 발굴되었다. 시호는 무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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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외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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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燈盞)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羨道]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鐵製) 석수(石獸),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동제(銅製)의 발(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被葬者)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이 나왔다.
널방[玄室]에는 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鐵鉾)·현금(玄琴) 등의껴묻거리[副葬品]와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흑칠(黑漆)이 칠해진 목관(木棺)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매치(埋置)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足座)·동경(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熨斗)와 동제(銅製)의 용기류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과대(銙帶)·식리(飾履)·팔찌[釧] 등의
꾸미개[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第三大臼齒)가 출토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실,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 야외정원의 3곳의 상설전시공간과
1곳의 특별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4년 5월 신축 개관하여 보다 나은 전시환경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2층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은 원삼국시대부터 사비(부여)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웅진(공주)을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재를 전시하고있고,
야외정원에서는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석조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소장품에는 국보19점 보물3점이 포함 되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국보17점이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
전시실안내
삼국시대의 왕릉 중 무덤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확인된 왕릉인 무령왕릉의 발굴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발굴을 통해 출토된 108종 2,906점의 유물 가운데 묘지석, 왕의 관식, 다리작명 은제팔찌 등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목관도 복원하여 전시되고 있다.
특히 3D영상시스템을 갖추어 관람객들이 출토유물의 모든 면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하였고
무령왕릉과 관련된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백제 웅진시기를 전후한 이 지역의 주거, 분묘, 성곽, 대외교류 관련자료들을 전시하여
웅진기 백제문화의 특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하였다.
천안 용원리유적, 공주 송산리고분, 공산성 출토품 등 총 13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최근 높은 관심 속에 발굴되어 4-5세기 무렵 공주지역 지방세력의 존재를 밝혀준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 출토품들도 공개 전시된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의 백제적 전통을 보여주는 계유명 천불비상 등 불교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웅진문화 관련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지(大通寺地)에 있던 대통사지(大通寺地) 석조(石槽)와
공주 반죽동 대통사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돌사자등 70여점의 석조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공산성
백제의고성...공산성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연지및 만하루...연못안에 계단이 있다.
*.부여 부소산
#.낙화암 백제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되고 백제700년의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 궁녀들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 보듯 우뚝 서있는 바위 절벽에서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러운 삶은 사느니 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리라’ 하며 몸을 던졌던 곳. 여인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숭고한 넋이 어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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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란사 백제연인들의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절로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 건립된 듯. 고란사란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는데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유명하며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 경관은 비길데 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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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고란약수임을 알 수 있도록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인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어 오게 하였다. 고란약수를 즐겨 마신 백제임금은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렸다 하며,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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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란사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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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관광지도
먼저 부소산(扶蘇山) 기슭의 백마강변에 있는 고란사(皐蘭寺)부터 찾기로 한다.
구드래 나루터로 가서 고란사 왕복 돗단배를 타기로한다..
부소산 서쪽 끝자락의 구교리 백마강변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 나루터를 비롯한 구드래 일원은 1983년에는 국민관광지,
1984년에는 충남사적 및 명승 제6호로 지정되어 공원화되었다.
1996~1997년에는 이곳에 조각예술품을 설치한 뒤
조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백제 문화권 출신 조각가들이 기증한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백마강변에 조각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 있다는 것은 부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백마강변의 유채꽃과 벚꽃
조각공원에서 구드래 나루터까지는 지척의 거리다.
백마강변을 따라서 끝없이 이어진 유채밭에는 활짝 피어난 유채꽃이 노오란 물감을 쏟아부은 듯하다.
부소산까지 이어지는 강둑길가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부소산 자락의 강변에는 만신을 중심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굿을 하고 있다.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진혼굿이라도 하는 것일까?
구드래 나루터는 삼국시대에 외국의 사신들이 사비성이나 부소산성을 드나들던 유서깊은 포구였으나
지금은 유람선만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다.
나루터 건너편의 울성산에는 법왕이 창건을 시작해서 무왕이 완성한 왕흥사(王興寺)터가 있고,
백마강 양쪽 기슭에는 낙화암(落花岩), 고란사(皐蘭寺),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
청룡사지(靑龍寺址),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나성(扶餘羅城) 등이 있으며,
부여읍내에는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등이 있다.
구드래란 말의 유래가 자못 궁금해진다.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처음에 '구ㄷ으래'였을 것이다.
왕칭어인 어라하에 '구(大)'가 접두사로 붙고,
두 말 사이에 촉음 'ㄷ'이 첨가되어 '구ㄷ어라하' 가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구드래'는 '대왕(大王)'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 천황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쓰여진 일본서기(720년)에도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로 칭한 문장을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 '구다라'는 '큰 나라', 곧 '섬기는 나라, 본국, 대국(大國), 대왕국(大王國)'의 뜻인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구드래 나루터
구드래 나루터에서 고란사로 태워다 줄 유람선에 몸을 싣는다.
백제의 법왕이나 무왕, 의자왕도 어쩌면 규암면 신리에 있던 왕실의 원찰인 왕흥사로 가기 위해 여기서
나룻배를 탔을지도 모른다.
나그네를 태운 유람선은 고란사를 향해 백마강을 거슬러 오른다.
불현듯 '꿈꾸는 백마강'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꿈꾸는 백마강'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슬픔과 한을
나그네의 애달픈 설움에 실어서 노래했기에 더욱 애절한 느낌을 준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오로리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낙화암과 고란사
잔잔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며 유람선은 부소산 북쪽의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인 낙화암(落花岩, 문화재자료 제110호)을 지난다.
바위절벽 중간쯤에는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썼다는
'落花岩'이란 글씨가 붉은색으로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다.
낙화암에는 사비성을 향하여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오는 나당연합군에게
능욕을 면치 못하리는 것을 안 삼천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장렬하게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삼천궁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삼천궁녀는 의자왕이 정사를 올바로 펴지 않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은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날조라고 생각된다.
당시 사비궁의 규모로 볼 때 궁녀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백제고기'에 따르면 원래 이 낭떠러지의 이름은 타사암(墮死岩)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삼천궁녀들을 꽃에 비유해서 낙화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잔잔한 수면을 가르며 유람선이 고란사 선착장으로 들어선다.
선착장에서 잠시 걸어서 올라가면 고란사에 닿는다.
'꿈꾸는 백마강'에서 나그네가 들었던 고란사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심한 사람들만 오고간다.
백제탑의 낙조, 부소산의 해맞이, 백마강의 봄빛, 낙화암의 소쩍새 우는 소리, 궁남지의 버드나무숲,
규암나루의 돛단배, 만광지의 추련(秋蓮) 등과 함께 고란사 새벽 종소리는 부여팔경 중의 하나인데,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못내 아쉽다.
*고란사
고란사(문화재자료 98호)는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고란사 창건에 대한 설은 두 가지가 있다.
백제 때 왕들을 위해서 세운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고란사는 백제가 멸망할 때 불에 타버렸는데,
고려시대에 삼천궁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백제의 후예들이 중창한 것이다.
절 뒤편의 바위벼랑에 자생하는 희귀한 고란초(皐蘭草)로 인해 고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란사는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으며,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의 두 번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1900년에는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와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에 다시 보수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최근에 새로 지었다.
고란사는 매우 작은 규모의 사찰이지만 백마강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바위벼랑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낙화암에서 몸을 날리는 삼천궁녀들의 벽화
고란사 법당 뒤에는 나당연합군에게 쫓긴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줄을 지어 백마강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백제의 장병들이 전멸을 당하고 적국의 군사들이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것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삼천궁녀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당시의 급박하면서도 처절한 상황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나면 어린이와 여성들의 희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백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란정
고란사 뒤편에는 바위절벽 밑에서 약수가 솟아나는 고란정(皐蘭井)이 있다.
이 바위절벽에서 자생하던 천연기념물인 고란초는 최근 거의 멸종되고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고란정 한쪽에는 플라스틱 상자안에 고란초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천연기념물이라는 명성만큼 그리 볼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아, 저게 고란초구나.' 할 정도다.
세종대에 나온 향방약성대전(鄕方藥性大典)에는
'옛날 원효대사가 사자강(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 부소산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은 진란은 없어지고 고란만 남아 있으나 아깝게도 고란마저 멸종에 가까울 정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란초는 벌써 세종대에 멸종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란초(Crypsinus hastatus)"는
고란초과(皐蘭草科 Polypodiaceae)에 속하는 상록다년초로 산의 그늘진 바위틈이나 낭떠러지에 붙어서 자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마디마디에서 고사리잎처럼 생긴 잎이 달리는데,
가죽처럼 약간 두껍고 광택이 나는 홑잎이지만 가끔 2~3갈래로 갈라진다.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은 가운데 열편이 가장 큰데, 길이 5∼15㎝, 너비 2∼3㎝ 정도까지 자란다.
잎의 윗면은 진한 녹색이며 아랫면은 약간 하얀색을 띤다.
포자낭은 잎 뒤쪽에 동그랗게 무리져 달리고 포막(苞膜)은 없다.
유사종으로 큰고란초(C. engleri)와 층층고란초(C. veitschii)가 제주도에서 자란다.
약이 귀하던 시절 중국에서는 고란초의 전초(全草)를 진해(鎭咳)와 해독(解毒), 이뇨(利尿)제로,
한국에서는 석위(石葦)와 함께 임질약으로 썼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약재다.
고란정의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니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고란정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백제의 의자왕은 늘 고란사 약수를 늘 즐겨 마셨다.
이 물 한 모금을 마시면 일년을 더 살 수 있다는 전설의 명약수를 마시고 의자왕은 원기가 왕성해지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궁녀들이 왕에게 바칠 물을 고란정에서 받아갈 때는 고란초 잎을 한두 개씩 띄웠다고 한다.
*백화정
*석정 안종원의 백화정 편액 글씨
*삼천궁녀가 몸을 날린 낙화암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고란사에서 오솔길을 따라서 백화정(百花亭)으로 오른다.
봄바람에 복사꽃잎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바람에 날려 땅위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세월의 강을 건너 낙화암에서 몸을 날리는 삼천궁녀들의 모습과 처연하게 오우버랩된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복사꽃...... 지는 꽃은 슬프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낙화암 바위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은 백화정(문화재자료 제108호)은 백제가 멸망할 때
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육각지붕의 정자이다.
2층의 바닥 주위로는 난간을 두르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이 정자는 1929년에 당시 부여군수의 발의로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우회(詩友會)에서 세웠다고 한다.
'百花亭' 편액 글씨는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1951)이 썼다.
백화정 누각에 오르면 백마강과 그 주변의 경치가 한눈에 펼쳐진다.
백마강에서 바라본 고란사
돗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