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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주 오봉산 (633m)

최두호 2017. 11. 20. 17:49

경주 오봉산(633m)

 

일시 : 2009년 5월5일 화요일

 

가는길 : 대구스타디움 - 수성IC - 경부고속도로 - 건천IC(좌회전) -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산행코스 : 건천읍 신평리 유학사 - 여근곡샘 - 주능선 삼거리 - 전망대 - 임도(주사암 가는길) - 오봉산(633m) - 마당바위 - 잇단암봉 - 주사암 - 주사골 - 서면 천촌동회관

 

포항근교 산행지 경주건천의 오봉산입니다

 


 

 

 

코스 : 성암사 입구(10:50) - 첫봉 전망바위 - 4봉 지능선 암봉 왕복 - 오봉산 정상(13:55) - 마당바위 - 천촌리쪽 능선 답사 - 부산성 안내판(16:00) - 정맥길 만남 - 복두암(17:50) - 성암사(18:30)   곳곳 기웃거리며 7시간 40분.

 

 연두색이 산행 코스.

 기암들 이름은 아래 지도가 쓸모있고, 낙동정맥 이 구간 지도는 주변 지형 조망에 도움된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간봄 그리매

모단 것아 우리 시름

아람 나토샤온

즈지 살쭘 디니져

눈 돌칠 사이예   

맛보압디

지조리 

郞이여 그릴 마자매 녀올 길

다봊 굴허에 잘 밤 이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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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봄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울어서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 하는구나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기를

짓고저

죽지랑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오


 

오늘 코스, 모죽지랑가의 배경 설화에 등장하는 부산성 일주다.

오랫만에 다시 읽으니 참 아름답다. 화랑으로 인연맺은 부하가 우두머리를 그리는 노래지만 충성 따위는커녕 비감어린 기묘한 연정마저 감돈다. 멋스런 신라인들이었다.

부소성 유적 답사를 겸했어도 좋았겠지만 신행 시작이 늦어 그닥 여유롭지 않았기에 서문이나 남문터는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좋은 코스이니 기회된다면 나중에 다시 볼 일이다.

  

삼국유사 배경설화를 장황하게 옮겨 보면,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낭도 중에 득오실(득오곡이라고도 함)이라는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날마다 나와 정진하고 있었는데 열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자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서

"그대의 아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 어머니가

"당전으로 있는 모량부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시켜 급히 달려가느라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죽지랑은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거기에 갔다면 찾아갈 것이 없지만 이제 공적인 일로 갔으니 찾아가서 대접해야겠소."

하고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가지고 좌인(방언으로는 개질지라 하니 종을 말함)을 데리고 갔다. 낭도 1백 37명도 모두 의례를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곡이 어디 있느냐?"하고 묻자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대로 부역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죽지랑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같이 돌아오려 하나 익선이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정을 아름답게 여기고 변통성이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생각하여 거둔 벼 30석을 주며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간진이 타던 말과 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이러한 후의를 입은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랑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조정에서는 화랑을 관장하는 이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한 짓을 씻어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하여 숨어 버려 대신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동짓달 극히 추운 날 성 안의 못에다 목욕시켜 얼어 죽었다. 대왕이 듣고 어명으로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쫓아 버리고 다시는 공적 기관에 들이지 않았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승려가 된 자가 있어도 큰 절에는 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사람에게 일러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의 자손으로 삼아 특별히 표창하게 하였다. 원측법사는 해동의 큰 스님이지만 모량리 사람이므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  출처 : 까페 <계림문화연구원>  -


 

주사암이란?

 

경주 주사암은 오봉산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 ‘불사처’ 별명 가져 오봉산 정상에 위치한 사적 제25호 ‘부산성’

부산이라는 기명은 신라 때에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부산성(富山城·사적 제25호)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이 오봉산 정상에 고아한 자태로 외로이 자리한 암자가 있다.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 차도 오르기 힘든

비탈길을 몇 시간이고 기어올라야 나타나는 이 암자는 깎아지른 바위들에 둘러싸여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바로 신라 문무왕 때 지어져 현재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는 주사암(朱沙庵)이다.


▲사람이 죽는 않는 곳
주사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진다.

당시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안에 두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고 예언했다 한다.

그래서 절을 짖고 난 후 바깥에 부산성을 축조, 절이 성내에 있도록 했다.

절을 지은 후,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신라가 멸망했으니 의상대사의 예언도 어느 정도는 적중한 셈이다.
특히 이 주사암은 창건 후 한 번도 사람이 죽어나간 적이 없다며 불사처(不死處)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오봉산 정상에 올라 암자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속세를 내려보는 느긋한 마음이 이 별명을 충분히 짐작케 했다.

▲주사암에 얽힌 설화들

신라시대 축조된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 주사암도 그럴듯한 설화를 품고 있다. 다만, 이 설화라는 것이

주 뼈대를 제외한 부가 이야기들이 서책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여 지금에 와서는 정설이 없다.

이 중 가장 인정받고 널리 알려진 설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옛날 주암(朱巖)에 거주하는 한 노승은

“아무리 경국지색의 미녀가 와도 나의 수도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귀신들이 노승을 시험하기 위해 궁에서 밤마다 아름다운 궁녀들을 납치해 노승 가까이에 두었다.

이렇게 귀신과 노승이 서로 도력을 겨루는 동안 매일 밤 궁녀들의 때아닌 외출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왕은 크게 노하여 궁녀들에게 “만약 납치된다면 그 주변에 붉은 모래를 뿌려 표시하라”고 명했다.

이후 경주 일대를 뒤지던 군사들은 오봉상까지 이르게 됐고, 어느 굴 앞에 붉은 모래가 한 움큼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굴에는 노승 한 사람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군사들은 이 노승이 궁녀를 유인한 것으로 보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노승의 주변에 신병(神兵)들이 나타나 이를 제지했다.

왕은 이 노승이 부처의 보호를 받는 고승임을 깨닫고 궁으로 불러 국사(國師)로 삼았다.

그리고 노승이 있던 굴을 넓혀 절을 지었으니 이 암자가 바로 지금의 주사암이다.


▲부산성 모죽지랑가

가파른 비탈을 올라 주사암을 만났다며 내려오는 길에 사적 제25호인 부산성(富山城)을 함께 보고

오는 것도 좋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3년이 663년에 축조됐고 다른 말로는 주사산성

(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건천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오봉산 정상에 위치하며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는 부산성(夫山城)으로 기록돼 있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다시 부산성(富山城)으로 명시돼 있다.
성의 둘레도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천765보(步) 3자로, 동국여지승람에는 3천600자 높이 6자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의 둘레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이 맞다고 전해진다.
현재 대부분이 붕괴해 남문 터와 외벽 일부분, 성 안에 군창지(軍倉址)·우물·연병장 등이 남아 있다.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서 옥문곡(玉門谷)까지 잠입한 뒤 축성했다는 역사 기록으로 미뤄 북쪽

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경주의 외성 성격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산성에 얽힌 이야기로 신라시대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해진다.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낭도(화랑도의 하급 조직원)인 득오(得烏)가 화랑인

죽지(竹旨)를 그리며 지은 8구체(八句體) 향가다.
가사의 원문이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竹旨郞條)’에 실려있다. 신라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고 하는 급간(級干·신라 관등의 제 9위)이 있었다.

어느 날 득오가 열흘간 보이지 않자 죽지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당전(幢典·오늘날의 부대장에 해당하는 신라 때의 군직)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 아간(阿干·아간은 신라 관등의 제 6위)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倉直·곡식창고를

지키는 직책)에 임명했다”고 답했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고 그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만은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소”라고 했다.
죽지랑은 부산성으로 찾아가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인 다음, 익선에게 휴가를 청했으나

익선을 이를 거부했다. 그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지금의 밀양)에서 수확한 벼 30석을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됐다.
간진은 익선의 막히고 변통성 없음을 천하게 생각해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득오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여전히 거절당했다. 이에 간진은 또 진절사지(珍節舍知·신라 관직의

제13위)가 쓰는 말안장을 더 주었고, 드디어 허락을 받아냈다.
후에 화주(花主·화랑을 관장하는 관직)가 이 이야기를 듣고 벌을 주려 했으나 이미 익선은

도망쳤고, 대신 그의 아들을 붙잡아 동짓달 몹시 추운 날 성 안 못에서 목욕을 시켜 얼어 죽게 했다

 

 

#1. 1996년 이맘때 경주 서쪽의 건천(乾川)땅 한 마을 뒷산에 큰 불이 났다. 북쪽 산자락에서 연기가 치솟더니 반대편인 남쪽 기슭까지 온 산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주민은 "세찬 바람까지 몰아쳐 봉태기만한 불길이 휙휙 날아다녀 반나절 만에 산 하나가 홀랑 다 타버렸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산의 한가운데 여성 성기를 닮은 독특한 형상의 한 지점은 신기하리만치 화마를 피했다.

#2. 시간의 화살을 천 년 전으로 되돌려 서기 636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5년, 한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라는 못에서 사나흘 계속 울어대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이 불길한 흉조라고 수근거리자 선덕여왕은 두 장수를 불러 "지금 당장 서쪽으로 가서 여근곡이라는 곳을 찾으면 그 안에 백제군이 숨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 죽이시오"라고 명령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500여 명의 백제군이 매복해 있어 출동한 신라군은 적군을 포위해 섬멸했다.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와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적군의 매복을 알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묻자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상(像)이요, 옥문은 곧 여근(女根)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의미한다. 해서, 서쪽의 여근곡에 적이 있음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삼국유사 지기삼사(知幾三事) 편에서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주 오봉산 여근곡(女根谷). 위 두 사례는 모두 이곳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아마도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쪽으로 갈 때 건천나들목과 경주터널 사이의 왼쪽 방향에 위치한 이 성스러운 모습을 한번쯤 봤을 수도 있을 게다. 이 구간은 고속도로가 중앙선 열차 및 4번 국도와 나란히 내달려 역시 목격 가능하다.

드넓은 벌판에 위압감을 주지는 않지만 병풍처럼 남북으로 길게 솟은 산줄기 한가운데 길둥근 모양의 두둑과 골이 절묘하게 조합돼 마치 음문 그 자체를 보는 듯하다. 그 음문을 둘러싸고 있는 지세까지 고려한다면 마치 '여성'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듯해 민망할 정도이다.

이 여근곡 깊숙이 등산로가 열려 있다. 신기하게도 여근곡 아랫 부분, 다시 말해 음핵쯤 해당되는 부위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산행은 건천읍 신평리 유학사~여근곡 샘~삼거리 안부(주능선)~멋진 전망대~임도(주사암 가는 길)~오봉산(633m·산불감시초소)~임도~주사암~마당바위~잇단 암봉~주사암~주사골~서면 천촌동회관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3시간 안팎. 하지만 기암괴석 아래 절묘한 터에 위치한 천년고찰 주사암과 부산성 마당바위 그리고 간혹 만나는 멋진 전망대에서의 조망 등으로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들머리는 유학사. 하지만 절 입구에 위치한 '여근곡 전망대'에 잠시 들러 여근곡을 먼저 보자. 숲을 나와야 숲이 보이듯 여근곡을 품은 오봉산 전체가 한눈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시선을 맨 우측 능선으로 돌리면 임신한 여인의 누운 모습도 확인된다. 실제론 여인의 머리 부분이 오봉산 정상이며 나머지 4개의 암봉이 정상과 합쳐져 오봉산(五峰山)으로 불린다.

<국제신문 자료>

 

여근곡에 대하여~

'어느 겨울날, 도성(都城) 인근에 있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모여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즉시 두 명의 각간(角干) 에게 2천명의 군사를 주어,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군사 500명을 섬멸케 하였다.

신하들이 그 지혜를 궁금해 하자 여왕은 이르기를 '성난 개구리는 병사(兵士)의 상(像)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뜻한다.

그러므로 서 쪽의 여근곡에 적이 있음을 알았고, 또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 드시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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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인지 몰라서~~

지도 검색만 했습니다. 혹시 다음에 같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길..ㅎㅎ

 

 

 

 

 

 

 

출처 : 늙은 빈수레
글쓴이 : 노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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